하나님이 열납(悅納)하시는 예배 – 요한복음 4:19-24
하나님이 열납(悅納)하시는 예배
요한복음 4:19-24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요한복음 4장 19-24절 말씀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선 축복받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 ‘열납’은 기쁠 열(悅), 드릴 납(納)으로, 다시 말하면 ‘기쁘게 받아들임’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잘못 드리면 자신이 망하고, 가정이 쑥대밭이 되고, 나라와 민족이 적군에 처참하게 짓밟힘을 당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배에 마지못해 나오거나, 체면 때문에 나왔다면 말씀을 듣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산 예배를 드리는 마음의 자세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부탁함을 드립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엄숙하고 신성한 과제는, 살아 계신 조물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행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의 본분이고, 또한 의무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인생의 목적이 예배입니다. 예배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배 행위는 우리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특권이고,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특권, 하나님께 은혜받은 일인데 예배에 간절함이 없다거나, 예배에 대해서 모른다거나, 습관적이고 마지못해 타의에 의해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떻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예배를 통해 인생의 보람과 가치와 존귀성이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성도님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존귀성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 본분과 의무도 포기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볼 때, 예수님이 유다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을 지옥의 땔감, 지옥의 자식들이라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과일이나 음식은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습니다. 가시는 중에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계시는데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왔길래 “물 한 그릇 떠 줄 수 없느냐?” 묻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의 옷을 보니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고 유대인입니다. “당신이 유대인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한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주님 말씀이 “네가 내가 누군 줄 알았더면 물을 주었으리라…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갈하지 않고 목마름이 없다.” 그러자 여자가 눈이 동그래지면서 주님께 “그 물 생수를 나한테 줄 수가 없습니까?” 물었습니다. 주님 말씀이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하셨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생수를 달라고 하는데 남편을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속였습니다. “남편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말이 맞도다. 과거에 남편 다섯 명 있었지? 또 현재 하나 있으나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맞도다.” 하셨죠. 여자가 깜짝 놀랬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다 맞췄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보기에 선지자로소이다.”하면서 예배에 관해 말하는데,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 행위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이다.” 그럴 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요한복음 4장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했다면, 주일날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정성 다하고 성품 다하고 힘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심정으로 주의 전에 나와서 십자가의 성호를 찬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을 ‘내가 한번 나가준다’고, 혹은 ‘한번 보러 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아십니까?
1.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의 개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대한 바른 개념을 몰랐습니다. 히브리어로 예배는 ‘샤하(חַחָשָׁ )’인데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① ‘섬긴다’는 뜻입니다.
첫째 ‘섬긴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 ‘공경한다’는 의미는 우선 ‘엎드린다.’입니다. 굴복을 뜻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만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홀로 받으시는 분입니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공경한다’에는 ‘따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역대하 29장 30절, 욥기 1장 20절을 보면 ‘몸을 굽혀 경배하리라’, ‘땅에 엎드려 경배하리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② ‘절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19장 21절과 예레미야 44장 3절에 보면 ‘경배하다, 섬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드(דַבַ ָעָ)’라는 동사입니다. 이 역시 ‘절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바드’의 명사형은 ‘에베드(דֶבֶַעָ)’인데 ‘종, 노예’라는 뜻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존재임을 성경은 정확하게 우리한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자기의 자주성은 다 버려야 합니다. 미명 시간부터 황혼 시간까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헬라어로 예배는 ‘프로스크네오(προσκυνέω)’입니다.
이 뜻은 첫째, ‘모신다’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죠. 예배는 하나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고, 하나님을 내 생활 가운데 모시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축복을 받는 역사가 예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가인 보세요. 가인이 예배를 잘못 드림으로 자손만대에 저주받은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빚더미에 올라 있고, 어렵고, 병이 있고, 낙심하여도 예배만큼은 경건하게 드릴 때 하나님의 돌보심의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높은 분이 말 한마디 위로해 줄 때, 감지덕지하지 않습니까? “걱정 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그것이 믿어져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면 그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면서 ‘네 말로 네 죄 사했다’ 할 때 모든 육신의 병이 달아나고, 부요의 축복을 받은 내용이 신구약을 통해 기록돼 있는 것을 우리가 한두 번 보고 한두 번 들었습니까?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둘째, ‘존경한다.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숭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굴복하며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예배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동시에 모든 축복을 다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신성한 인간의 행위입니다.
2.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의 성격에 대해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예배가 있다고 창세기 4장 1-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았지만,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제사 의식이나 방법이나 제물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초점은 첫째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 자세, 둘째는 정성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지 구약에는 설명이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 그 해명이 나와 있는데 히브리서 11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
하느니라
첫째 마음 자세, 믿음입니다.
아벨이 죽은 지 벌써 6천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벨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셔서 만인간들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히브리서 11장 4절이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어디 있느냐? 요한일서 3장 12절 말씀 볼 때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했습니다.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적지가, 소속이 악한 곳입니다. 창세기 4장 5-6절 보세요. 가인이 안색이 심히 분해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했으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요한일서 3장 12절 말씀 그대로 입니다. 악한 자에 속해서 악령의 지시를 받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한일서 3장 12절 잊지 마세요. 예배에 회개가 없으면 그게 무슨 예배이겠습니까. 가인의 길에 행하면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잠언 29장 10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29:10 피 흘리기를 좋아한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유다서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지금부터 약 2,700년 전,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절기, 월삭, 안식일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양과 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 제발 성전에 나와서 그런 짓 하지 말라. 꼴도 보기 싫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1장 11-15절 보세요. “교회 문지방, 교회 마당만 밟고 왔다갔다 한 너희들이지. 지금 너희들이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냐?”고 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정성이 없는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이 절대 받지 아니한다는 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말라기 1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너희들이 나를 공양한 게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니 당시 제사장들, 장로할 거 없이 “우리가 언제 공양을 안 했습니까?” 뻔뻔스럽게 따져 묻습니다. 헌물을 아까워하고 싫어하고 인색합니다.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너희 세상 총독들한테 그렇게 해 봐라. 좋아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내 성전 문을 닫아서 제발 기도 못하고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시원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너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간곡히 한두 번 부탁했습니까?
3. 참된 예배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조작하고, 인간이 만드는 그렇게 인간으로 옮겨지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되었고, 하나님께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한 응답입니다. 이것이 타율주의 종교의 특징입니다. 자율주의 종교 즉 이방 종교의 예배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인생에게 예배 받으실 분이라고 인생에게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어떻게 예배할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구약의 아벨의 제사, 노아의 제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제사입니다.
계시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인격적 주시라는 겁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유일무이 하신 독존의 하나님 즉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며, 세 번째, 하나님은 열국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위해서 선민으로 부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가 우리의 본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택하여 주셔서 구원의 반열에 세워 주실 줄로 확신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생활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걸어가도 예배입니다. 친구와 선생님, 부모님과 대화하는 중에도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 우리 생활은, 우리 기독교인의 생활은 바로 예배 생활인 줄로 믿습니다. 어디가나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성경보고 선한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고 이것이 예배이지 주일날 교회 한 번 와서 앉아 있다가 축도 끝나자마자 가는 게 이게 예배이겠습니까? 이 다음에 후회하게 됩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구약 때, 레위기에서 사람이 죄중에 빠져 있을 때 반드시 속전으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희생 제물은 어린양이나 소나 비둘기 같은 동물인데 반드시 흠이 없고, 점이 없이, 정결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희생의 제물은 궁극적으로 우리 죄를 대신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를 보자마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요한복음 1장 29절에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이 희생의 제물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면, 우리들 중심에 뜨거운 예수의 보혈이 분명히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 다”고 히브리서 1장 1-2절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자기 계시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의 제물이 되신, 즉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원만하고 완전하고 충분한 대속의 제물이 되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아 말씀으로 나왔습니다. 말씀으로 운행하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도 주로 말미암아 돌아가기 때문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재주와 인격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백세에 외아들 하나 얻었는데, 목을 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 모리아 지방 한 산에 올라갈 때 “아버지 나무와 불은 여기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그 아버지 가슴이 얼마나 송곳으로, 칼로 찌르는 아픔을 당했나 생각해 보세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내가 깜빡 잊어 먹었구나. 잊어 먹고 제물을 안 가져 왔어. 돌아가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묶어 놓고 칼을 빼서 목을 치려는 찰나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손대지 말라.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하셨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도할 때 가볍게 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참 예배입니다. 참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성령의 강한 내적 증거를 입은 자들이라는 것을 아셔야만 되겠습니다. 우리 예배의 위대한 세력은 성령님의 강한 인도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여러분들 머리,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임해서 성령님이 주권자가 되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은 여러분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배 중 기도도 성령의 인도에서 오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배 중에 신앙고백도 성령의 강권에 의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다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배 중에 증거와 간증도 성령의 역사에서만이 가능하다고 요한복음 16장 26절에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 어떻게 됐습니까? 로마 군대 백부장이지만 늘 기도 했죠. 선한 구제 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데려왔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한 말씀을 증거할 때 고넬료 가정에 종이나 남녀 차별 없이 성령이 강하게 임했다고 사도행전 10장 4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부끼리 예배를 드려도 성령의 역사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아이구 우리 둘이서 무슨 예배를 드려?’ 그러지 마세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하나님께서 나도 너희 중에 있겠다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분입니까? 예배 중에 시와 찬미 또한 성령으로 인도되어야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써 화답하라고 말씀했습니다(엡 5:18-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 중에 평강과 축도도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축도는 사람의 마음대로 하는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이 축도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축도는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가장 복 받는 순간인데 축도할 때 먼저 가거나 하지 마세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참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 이 놀라운 진리의 영이 그 주도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겉으로는 경건한 것 같지만 속은 응큼하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서 절대 받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머리와 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지체들은 언제든 몸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각 지체는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어야 된다고 에베소서 2장 22-2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개인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저희들은 순종하고, 깨닫고 또한 말씀을 받들면서 주일만 예배드리는 그런 습관 갖지 말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장사할 때라든가 여러분의 모든 생애가 예배가 되시길 바랍니다. 늘 경건한 삶의 축복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살아 계신 삼위일체의 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고, 은총의 주 성령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구약에 제사 드릴 때 보세요. 목욕했죠. 몸도 마음도 깨끗해야 합니다. 제물도 흠이 없이 깨끗해야 합니다. 제사 행위와 예배 행위는 우리가 의식을 따르지만 그 정신과 원리는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의 방편,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첫째 신령과 진정입니다. 신령은 성령의 감화입니다. 진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죠.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진리를 방편으로 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준엄한 요청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의 본분이요, 의무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의 축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 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성령의 감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섬기기 위하여 고용된 거룩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생은 예배드리는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인생만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 바로 엎드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을 알 때에 여러분들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둘째, 내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범죄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고, 힘 다하여, 뜻을 다하여, 성품 다하여, 목숨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이 땅 위에 보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까지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 것 진실로 감사합니다. 영원히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만세 전에 예정하고 택하여 불러 예수의 십자가 피의 희생의 제물로 내가 구원받게 된 것 진실로 감사합니다.” 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백배 말씀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예배의 감사와, 예배의 찬송과, 예배의 모든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인생은, 예배적 인격자가 된다는 것을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확실히 알았습니다. 인생의 본 위치와 자세로 돌아가게 하신 것을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인생에게 이 예배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제시하시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인생의 예배와 거룩한 전당으로 저희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교회는 망하는 법이 없이 없으며, 예배의 자유를 오용하고 남용할 때 도덕계와 영계는 캄캄해진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호를 찬송하면서 과연 인생의 본분이 무엇인지 오늘 확실히 알았사오니 예배를 드릴 때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 다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산 예배만이 저희들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오늘날까지 예배를 등한시 여겼습니다. 소홀히 여겼습니다. 우습게 여겼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목적이 있다면 예배이고, 의무가 있다면 예배이며, 우리의 존귀가 있다면 예배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은 시간도 주께 영광 돌리는 예배만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빌고 원하올 때에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 받들어서 감사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1986년 11월 2일 주일 3부 예배
박아브라함 목사
- 25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