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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마다 모이는 교회 – 히브리서 10:19-25

2025.01.27 16:33

예배 시간마다 모이는 교회

히브리서 10:19-25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고 하는데, “밖에서 불러내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름 받아 공적인 장소에 모이는 것을 뜻합니다. 모인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밖 멸망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영생의 자리로 옮겨진 성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는 부름 받은 성도들 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지정된 장소에 모여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그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정된 장소에 모이는 것은 기독교의 일대 특색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모이는 것은 교회 존립 자체를 좌우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부터 오늘날까지 교회를 무시, 방관하는 경향들이 있었기에 예수님도, 사도들도 이를 경계하는 교훈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이 있었던 사실을 저희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오직 살아계시는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밖으로 어떤 문제가 있고, 안으로 어떠한 내분이 있다 해도 우리 교회 전 성도님들은 우리 신앙의 예배의 대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입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 역사하심을 따라서 주시는 은혜를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가 돼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신자로서의 의무감이나 종교의식의 한 규례만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보다 더 차원 높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모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오늘날 여러분들이 모였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의 뒷받침이 베드로전서 2장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은 인간에게 경배 받는 일을 최고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모든 일에서 경배를 받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지정된 처소에서 경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거제와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우양의 처음 낳은 것을 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신 12:5-6). 지정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지정된 예배 의식을 통하여 경배를 받으십니다. 무질서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공동 기도가 있습니다(시 5:7, 96:6). 찬송이 있습니다(대하 5:13, 30:21). 헌금이 있고, 설교가 있습니다(느 8:4-7). 성례와 성찬이 있습니다. 또한 권징이 있습니다. 축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도의 최고 특권입니다. 예배의 특권을 왜 빼앗기고 있습니까? 교회 나오는데 왜 두려워하고 주저합니까? 안이나 밖에서 요란하고, 무슨 말이 돈다고 해서, 두렵다고 해서 교회 안 나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해 주셨습니까? ‘선한 일에 힘쓰는 백성이 돼라’고 디도서 2장 1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났다가 한 번 죽는 것입니다. 일사각오 순교정신 가지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옳은 의를 위해서 살다가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집, 권세의 집, 능력의 집, 신령의 거룩한 교회당에 여러분들의 모든 생애를 맡기면서 다시 믿음을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 모든 일들, 모든 진행, 모든 사건은 그 어느 하나라도 예배를 위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만 예배드립니다. 실질적으로 엿새 동안의 모든 일은 그 예배하는 사명을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제7일 거룩한 주일날 예배하는 사명을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교회의 모든 순서와 일들은 예배를 위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 장로, 권사를 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의 네 파, 내 파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말씀을 볼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제사드리도록 지정하심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8장 말씀 볼 때 야곱은 벧엘에서 제사드리도록 지정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신정 시대에는 성전에서, 선지 말기에는 회당에서, 지금은 교회입니다. 세계만방에 산재하고 있는 모든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도록 지정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받기 위해서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또한 말씀을 받기 위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사람끼리 패를 가르고,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말만 충만합니까? 개혁자들은 교계 모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최고의 것으로 믿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교회는 말씀 선포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받고 배우는 곳입니다. 교회는 어떠한 권력을 추구하는 곳도 아닙니다. 목자는 양들의 영혼이 말씀으로 윤택하도록 푸른 초장으로, 시냇물가로 인도해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의식이 중심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간증 중심, 흥분, 감각적인 육체 중심입니다. 그러나 참교회는 말씀 전파가 중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위대한 영적 양식의 보급소가 되어야 됩니다. 말씀의 센터가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영적 병을 치료하는 종합병원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으로 다시 출생시키는 산파와 같은 일을 해야 됩니다. 말씀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성도가 되게 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1:23). 교회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모든 비방하는 일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베드로전서 2장 1~2절 말씀같이 연약한 생명을 강건케 치료하는 병원과 같습니다. 말씀 받아보세요. 정신이 온전해집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자기의 갈 길이 환하게 보입니다. 뜻을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죄 진 이후로 오늘날까지 세상 역사를 볼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헐어버리는 악독한 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고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이단이니, 사교로 모는 그 자체는 어두움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권력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헐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말씀이 약합니까? 요한복음 15장 3절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 9절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고난주간 때 요한복음 17장 17절에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 종합병원에서 모든 치료를 받았습니다. 제발 신앙적으로 환자가 되지 마세요. 신앙적으로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 박해 300년 동안에 교회는 죽음을 각오하고 모였습니다. 그들은 박해자의 눈을 피해 ‘카타콤’이라는 땅굴을 여러 수십 갈래로 파고 성도들의 시체를 매장하고 또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침내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자유를 누리게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번성과 축복의 운동을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번성과 축복의 운동을 위해 교회에 모여야만 되겠습니다. 모임은 힘을 상징합니다. 정신력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 운동의 힘을 과시하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세상에서 전투하는 영적 단체입니다. 십자가 군병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칠 사명자는 다 어디 갔습니까? 교회는 철통같이 단결하여 꽉 짜여 있는 원수들의 작전에 응전해야 합니다. 방어뿐 아니라 계속적인 공격을 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와 같이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으로 정복해야만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정복을 해야 합니다. 전투하는 병사에게 개인주의는 망조입니다. 이 시대 마귀의 전술 중 하나는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마 12:30, 눅 11:23). 교회 출석을 하지 아니 하는 자는 주님의 반대자이며 헤치는 자입니다.

주님은 모이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영적 운동의 참된 유력한 굳센 기반은 모이는 것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모이는 곳에서 기도 운동이, 성령 운동이, 회개 운동이, 전도 운동이, 충성 운동이, 신앙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형제자매들이 모이는 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시 133:2)” 성령 강림의 형상을 시적으로 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역시 성령 내림의 충만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시 133:3).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습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성령 충만한 결과 영생의 축복을 누림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영적 운동의 축복을 말합니다.

미스바의 부흥 운동도 모임으로써 블레셋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신앙 운동도 이스라엘 민족이 강변에 모였을 때 가능했습니다. 에스라의 회개 운동도 수문 앞 광장에 백성들이 모임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초대 교회가 완성한 비결도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또 모이고 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성령 받기 위해 모였습니다. 떡을 떼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증거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세요. 낙심은 성도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 이하에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은 어디 있습니까? 모여서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로 영광을 돌리는 데 있지 않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설교를 들은 여자들의 모임에서, 감옥을 지키던 옥사장 가족이 회개하고 전 식구가 바울 앞으로 모임으로써 생겨났습니다. 베드로의 석방은 사도행전 12장 말씀을 볼 때 개인집에서 모여 기도하는 일로 인하여 성공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완성은 1년 간 모여서 성경을 통한 사경회를 한 결과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 가족의 축복은 온 가족이 또한 친척들이 모아 놓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예배드리는데 있지 않았습니까? 여리고성의 함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행동을, 소리를 단합한 결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이적은 모임 중에서 일어납니다.

역사의 족적은 인간 모임의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집이 생기고 마을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시장이 생겼습니다. 공장, 전차, 버스, 배가 생겼습니다. 사회, 국가, 세계가 생겼습니다.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교회의 흔적은 성도 모임의 흔적입니다. 모이는 교회에 열심이 일어납니다. 기도가 터집니다. 모이는 교회에 회개 운동이 일어납니다. 말씀 운동이 일어납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살맛이 납니다. 성도가 모이는 곳에 마귀가 도망치고, 마귀 왕국이 파괴되고, 하나님 나라가 건설됩니다. 기독교는 모이는 교회 운동입니다. 모이지 않는 곳에 기독교는 설립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모임으로 시작해서 진행되고 새 하늘 새 땅에서 함께 모이는 것으로 그 절정에 오르게 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이 흰 옷 입고 새 노래 부르는 그 시간, 최고의 장소, 새 예루살렘에 모인다고 요한계시록 21장에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이고, 그 섭리 활동의 특별 무대가 아니겠습니까? 거기에서 인간 역사의 최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는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는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읍시다. 우리는 모여서 할 일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진실 되고, 충성 되고, 거짓이 없는 모든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은 간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지어내지 마십시오. 자기의 편의를 위해서 남을 매도하는 그러한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지옥의 명단에 오르게 됩니다.(계 21:8, 22:15, 롬 1:24) 성도 여러분들은 당회장 이하 평신도 하나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됩니다. 남한테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성도들은 환난 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밑에 있는 자들입니다. 영적 비상 시기에 교회의 빈사 상태가 계속되는 이 시기에 십자가와 관계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있을 때에 거기에 오직 누가 남아 있었습니까? 요한과 마리아처럼 되어야 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표지가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1994년 4월 6일 수요 예배
박아브라함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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