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함(전도서 7:13-14)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함
(전도서 7:13-14)
하나님이 경영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역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볼 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또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시므로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참된 지혜를 가질 때 비로소 죽음과 삶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신앙의 건강한 태도 속에서 생활에 승리할 수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창조주를 어떻게 알아요? 아담이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과 솔로몬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아는거 아닙니까? 교회에 와서 성경이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벌써 만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와 우매자를 서로 대조해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아름답고 영예로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름다운 영예로운 이름이 무엇입니까? 구역장, 집사, 권사, 장로, 목사 같은 ‘이름’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어떤 권세, 명예, 어떠한 지혜, 어떠한 재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름의 귀중성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그 영예로운 이름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눈에 보이는 땅의 세계만 자랑삼아 따라가는 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두 번째, 우매자의 노래를 추구하는 것보다 인생의 곤고함을 숙고함이 더 낫다.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슬프고 가난하고 답답하고, 차 한 잔 대접할 수 없는 집이지만 거기 가는게 낫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영생 문제가 달려 있거든요.
세번째, 급한 마음으로 분노를 발하는것 보다 신앙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고 듣는 것이 낫다.
‘저분이 나에게 저렇게 말하는 의도가 무엇이냐’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깨닫고 성깔 내지 않고 다 듣는 겁니다.
네 번째, 돈보다 지혜를 사랑함이 더 낫다.
돈은 이 세상에 머무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신 겁니다. 이걸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추구하게 됩니다(딤전 6:10).
다섯 번째,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보다 하나님 뜻에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 낫다.
쉽지 않습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히브리 원어에는 너 자신을 알라고 그랬습니다.
여섯 번째, 적절하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낫다(전 7:15-18).
이상의 내용을 깊이 살펴볼 때,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더 낫고 지혜롭다고 하는 진리가 세상사람들의 일반적 상식과 이성의 눈으로는 더 우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비록 당장 보기에는 어리석고 답답하며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언정 전도자의 훈계와 책망을 좇을 때, 영생의 길, 축복의 길, 형통의 길이 활짝 열려져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아주 온전하고 영원합니다(히 13:8, 말 3:6, 약 1:17-18). 그래서 이 세상에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원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의뢰하면서 나의 소원을 하나 님의 창고에 둡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공포감이 없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린애들이 부모와 같이 동행할 때는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믿을 때 어린이가 육신의 부모 믿듯 그렇게 믿어 보세요. 왜 망합니까?
이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충만합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 그 어떤 것도 사람이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시는 세 가지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 행복을 누리라 그랬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을 볼 때 ‘형통한 날에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좋게 되라, 좋은 것을 생각하라. 좋은 때, 좋게 살라, 선하게 살라, 만족하게 , 감사가 빠짐없이 살라’고 되어 있습니다(롬 1:23). 그것이 만족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범사에 기한이 있다 하셨습니다(전 3:1-8).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전시간, 곤고한 사건을 규정한다는 뜻입니다. 몇 천억원대 자산을 가졌다, 몇 조원을 가졌다 해도 70-80 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영원하신 생명의 주로 모시고, 창조주로 모신다는 거, 또 우리 생명도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산다는 것! 변화의 부활체의 몸으로 산다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사람들이 고생하고 굶고 헐벗고 먹지 못하고 가난 한 것이 본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애 3:33). 그렇다면 하나님이 안 주시는 이유가 뭐냐?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앙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단 마귀의 요구대로 욥의 축복을 다 끊어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주권 행사에 감사해서 다시 축복을 받았습니다. 육신의 욕심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계신지를 알면서 살 때, 신명기 28장 6절 말씀처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습니다(시 121:8).
주후 300년경 교회사 초기시대. 초대교회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습니다. 핍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150m, 200m 땅굴(카타콤)을 파서 살면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신앙의 자유가 왔죠. 그런데 교회는 오히려 타락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입신출세를 하기 위해서 경쟁자를 모략해서 내쫓고 지위가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가 세속화가 되어버렸습니다.
헨리 8세의 맏딸, 영국 여왕 메리는 기독교인을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의 피를 보지 않으면 잠이 안올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혹한 피의 여왕 메리가 왕좌에서 물러나고 종교의 자유가 왔을 때, 기독교인들이 더 타락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통한 날, 집안이 평안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없으면 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통의 날을 감사하면서 기쁘게 만족하게 선용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또, 곤고할 때는 생각하세요. 전도서 7장 14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일이 틀려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알아라. 아무도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잘 안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인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탐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생활 자체가 어두워집니다. 다시 말하면 의와 불의를 분별할 수 없는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전 7:7).
열왕기하 5장 말씀 볼 때,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계집종의 이야기를 듣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갔습니다. 자기가 찾아가면 엘리사가 나와서 정중히 절하고, 몸에 안수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고쳐줄 줄 알았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엘리사의 몸종 게하시가 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요단 강가에서 7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 병이 낫는다고 알려 줬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난거 아닙니까. 나아만이 엘리사를 죽이려는데, 그의 신하가 말리면서 “아니 이보다도 더 어려운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밑져야 본 전이니 가는 길에 한번 요단강에서 내려가 보시죠.” 해서 씻어보니, 나은 거 아닙니까. 엘리사에게 은금보화 좋은 선물을 다 주겠다고 하니 거절했어요. 그때 몸종 게하시가 가서 나에게 좀 달라고 해서 줬습니다. 그 순간 나아만장군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 옮긴 거 아닙니까(왕하 5:20) 하여튼 물질에 탐심있는 사람 치고 안 망한 사람 없습니다. 없어요.
가룟 유다를 보세요. 예수님의 회계입니다. 회계를 아무에게나 맡깁니까. 그런데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먹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다 보시는 것 같아 두려워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다시 돌려주니 ‘필요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줄에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마 27:5, 행 1:18).
곤고한 날, 역경의 날, 고통의 날, 시련의 날, 괴롭고 답답할 때. 그때 ‘생각하라’ 했습니다. 원어적으로는 ‘보라’는 말입니다. 곤고한 날에 뭘 봅니까? 첫째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학개 1장 5절을 볼 때 ‘네 자신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 아래 인생이 곤고해질 때가 자신을 살피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빤짝하는 순간의 기회! 인생의 곤고한 날을 만나는 경우는 모든것이 자기 뜻대로 잘 안되는 시기입니다. 그때 자신의 무능을 보고, 한계를 보고, 부족함을 보고. 자신이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저 겁만 내고 우물쭈물 하다가는 가진 것까지 다 놓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 방종!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데 어디서 도망 가서 어디로 갈겁니까?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따라 가겠다’ 하셨습니다(삼하7:9). 숨을 데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둘째 아들이 자기 유업을 달라고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줬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다 탕진했는데 마침 흉년이 들었습니다. 갈 데도 없고, 너무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었죠. 그때, 곤고를 당할 때 생각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 체면이고 뭐 다버리고 아버지 집에 가는거 보세요. 거지도 상거지 되어서 옵니다. 그걸 붙잡아가지고선 그냥 목욕시켜 주고 새 옷 입혀주고 약속된 반지를 끼워주고 새 신발을 신기고 동네사람 불러서 살진 소를 잡아다 잔치한거 아닙니까?
탕자같이 곤고를 당할 때, 우리는 도망가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 자신을 보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모든 생활에 하나님 없는 삶을 살지 않았나 돌아봐야 합니다. 사업해 서 돈을 벌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계시기 때문에 십일조 떼어먹고 감사를 다 떼어먹는 거예요. 학개 1장 9-12절을 볼 때 하나님이 불어 팽개치십니다.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다 달아나고 마지막에는 우리 몸까지 불어 버리십니다. 겁나지 않아요? 왜 곤고한 날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의 지하지 않습니까? 사업할 때는 ‘주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해놓고 왜 돈벌면 그렇게 떼어먹습니까? 제가 돈 때문에 이 말씀합니까? 제가 이 말씀 안하고 그 나라가면 제가 지옥갑니다. 하나님께서 “야, 평강제일교회 원로목사야. 성경에 있는 말씀을 왜 대주지 않느냐? 너 교회 눈치보고 목회했느냐?” 하십니다.
말라기 3장 말씀을 볼 때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시험해 보라고 했어요. 십일조 바치는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원에서 천원 바칠 수 있어요. 십 만원에서 만원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만원에서 십만원, 천만원에서 백만원, 일억원에서 천만원 내라고 하면 점점 어려워집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이렇게 십일조 낸다고 해서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거하나님거예요.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제발 하나님 앞에 헌물과 십일조와 감사를 떼먹지 마세요.(말 3:7)
학개서 1장을 볼 때,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 짓기가 아직 이르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좋은 집을 지으면서 성전을 짓는 것은 이렇게 아까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저축해도 구멍이 난 전대에 넣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학 1:6). 그러한 바보짓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예수 믿고, 의지하고, 예수께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심판을 봐야 합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죠. 앗수르와 애굽이 얼마나 부강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갈 때, 애굽 왕은 그것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종도 없어지고 식모도 없어지니까 다시 잡으러 갔다가 바로가 홍해에서 빠져 죽은거 아닙니까. 성경말씀을 볼 때 430년 동안 임금 착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오게 합니까. 은혜로 애굽사람들을 다 정신병자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고 하면 다이아몬드, 금은 보석을 다 내준 겁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일본, 심판 안 받은 나라가 어디있습니까. 다 받았습니다.마찬가지로 사람이 한번 났다가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 나라가면 날 때부터 전부 다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죄진 것은 하나도 기록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걸머지셨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 뜻을 위해서 일한 것은 다 기록되는거예요. 그때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롬 2:4).
바라옵기는 여러분들이 철두철미하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이 땅에 살면서, 일이잘될 때 감사하세요. 곤고할 때 좀 깊이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날까지 내가 신앙생활 어떻게 했느냐? 다 알아야 됩니다. 십일조 떼먹은 거, 여러분들이 부자 되거든 계산해가지고 그거 다 하나님 앞에 바치세요. 그냥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은행 대출받아서 내라는게 아닙니다. 부자 되거든 잘못된 것 깨닫고 바치게 되면 하나님께서 가만있지 않습니다. 크게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에스더 4장부터 9장까지 보게 되면 하만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씨를 말리려고 했죠. 그것을 모르드개가 알고서 자기 조카 에스더한테 가서 얘기 했습니다. ‘네가 왕비가 된 것은 이러한 때 민족을 살리기 위함이다. 네가 만약 가만히 있으면 이민족은 다른 사람을 통해 구원받을 것’이라 하니 에스더가 놀래서 3일 동안 금식기도 한 거 아닙니까? 왕이 홀을 들기 전에 그 전에 들어가면 능지 처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으로, 오라는 말도 없는데 나아간 거 아닙니까. 마침내 왕이 에스더를 통해서 하만의 계략을 다 들었어요. 그래서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서 50규빗 되는 큰 장대에다 하만을 달았습니다. 하만의 아들 10명도 전부 다 죽여서 나무에 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려던 하만의 신복들, 75,000명의 목을 쳤습니다. 한 놈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보세요. 곤고한 날에 괴롭고 답답한 한 날에 금식기도 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전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평강교회를 이러쿵 저러쿵 모략하는 사람들을 나는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고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께 부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있지 않으실 겁니다.
장래 일을 우리가 알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죽을 날짜 모르는거 얼마나 좋아요. 이거 피차에 알아보세요. 여러분들이 알게 모르게 죄지은 거 피차에 알아보세요. 이렇게 와 있겠습니까. 다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 너무 감사하죠. 알면 또 하나님 믿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이다.’ 하고 예배도 안 드릴 거 아닙니까.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나약한 인생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장래사를 아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믿고 산다는 자체가 행복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05년 7월 31일 주일2부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