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1951년 양양-오색-고성 진격전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1951년 양양-오색-고성 진격전
지금부터 73년 전인 1951년 5월. 만 1년을 향해 가던 6ㆍ25 전쟁은 동부 전선에서 극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되찾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26일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12월 15일부터 흥남 철수 작전이 시작됐고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준다. 중공군은 2월 공세와 4월 공세를 통해 파상적으로 밀어 붙였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 등에서의 영웅적 항전으로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5, 6월 6ㆍ25 전쟁의 방향을 트는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이 펼쳐진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현리 전투 대패
1951년 ‘4월 공세’에도 불구하고 서울 점령에 실패한 중공군은 5월 들어 중・동부 전선에 역량을 결집해 일제 공세를 시작했다. 미군에 비해 ‘약한 고리’로 생각한 국군을 집중 공격해 전선을 뚫고 내려가려는 것이었다. 5월 16일 중공군 9개 사단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일대에서 국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국군 3사단과 9사단은 2만 2,043명의 병력 중 62%인 1만 2,840명이 희생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까지 60여 km를 밀려 내려가야 했다. ‘역사적 대패’라는 오명을 얻은 현리 전투로 국군은 3군단이 해체(5.26)되고, 미군에 의해 육본의 작전 지휘권마저 박탈되는 치욕을 겪는다.
기적적 대반전
그러나 곧바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빠른 속도로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의 필사적 반격으로 중공군과 북한군 6만 병력이 와해되고, 적군은 마침내 설악산을 버린 채 38선 이북 금강산까지 쫓겨 올라간 것이다. 이 전투가 바로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이다.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의 손실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5월의 학살’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중공과 북한은 5월 공세의 실패로 6ㆍ25전쟁의 승리에서 멀어졌고, 국군과 유엔군이 전장(戰場)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결국 1951년 6월 23일 공산 진영은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휴전 회담을 제의하게 된다. 이후 휴전 협정 직전인 1953년 6월 최후의 대공세인 금성 전투 전까지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를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한다.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은 같은 시기 중부 전선에서 벌어진 용문산 전투 및 화천 추격전(파로호 전투)과 함께 오늘날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전투인 것이다.
‘6・25 전쟁 최강의 부대’ 18연대
월남한 청년들을 주축으로 1947년 창설된 국군 18연대는 6ㆍ25 전쟁 당시 국군, 미군, 북한군, 중공군을 통틀어 가장 강한 부대로 이름을 날렸다. 공산주의의 실상을 이미 체험한 청년들이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친 부대였기 때문이다. ‘백골부대1)’로 불린 18연대는 현리 전투의 대패 속에서도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병력 손실도 거의 없었다. 일주일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황에도 연대가를 부르며 전장에서 철수했다. 현리 전투 대패로 3군단이 해체되자 18연대가 속한 3사단은 5월 22일 1군단2)에 배속된다. 5월 24일 새벽 5시경 18연대는 정선군 임계면 송계리 일대에 집결해 병력과 장비를 보충받고 재편성됐다. 현리 전투 대패 후 열흘이 채 되지 않아 다른 패전 부대들은 작전 참여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5월 25일 1군단은 현리 전투로 하진부리까지 밀고 내려온 중공군과 대관령에서 격전을 펼쳐 격퇴시킨다. 이에 따라 1군단은 5월 26일 새벽 6시부터 대대적 반격 작전을 개시한다.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11사단은 5월 28일 새벽 2시 매복산(양양군)과 가잔리, 인구리(양양군)를 잇는 목표 지역을 빼앗는다.
1) ‘백골부대’는 18연대의 북한 출신 장병들이 철모에 “죽어 백골이 돼도 고향 땅을 되찾겠다.”며 백골 마크를 그린 데서 유래됐다. 18연대는 6ㆍ25전쟁 초기 수도사단 예하였지만 흥남 철수 이후 3사단에 배속됐다. 이후 3사단 전체가 백골부대로 불리게 됐고, 18연대는 ‘진(眞)백골’이라는 별칭을 쓴다.
2) 육군의 부대 편제는 군단-사단-연대-대대-중대 순이다.
오색에서 벌어진 격전
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11사단이 서쪽에서 설악산 일대를 공격하고, 수도사단은 동쪽에서 간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대공세를 위해 추가 부대가 필요해지자 마침내 3사단의 정예부대인 18연대에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양양을 지나 오색국민학교에 집결한 18연대는 5월 29일 새벽 6시 가라피리의 공격 개시선을 통과해 마산리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현재의 오색 여호와이레 수양관이 위치한 바로 그 지역이다. 서쪽의 11사단이 원통과 미시령 일대를 공격하는 동안 적이 포위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오색 일대에서 고착시키려는 것이었다.
오색 일대에는 북한군 13사단 2개 대대가 험준한 산악 지대와 협곡을 이용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주공(主攻)을 맡은 18연대 3대대는 양양에서 오색으로 가는 도로의 오른쪽 방향으로, 조공(助攻)을 맡은 2대대는 도로 왼쪽의 능선을 따라 공격해 올라갔다. 1대대는 예비대로 3대대를 따라 진격했다. 북한군 후방인 오색약수터 부근 고지로는 수색중대가 침투해 들어갔다. 북한군의 퇴로를 끊고 포위하기 위해서였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북한군은 좁은 산악 능선의 요지마다 진지를 첩첩이 구축해 저항했다. 18연대가 한개 진지를 돌파할 때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장병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 백골부대의 전통에 따라 쏟아지는 포화를 뚫으며 전진했다. 전방에서 사격해 북한군이 진지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측면과 후방으로 부대를 투입해 진지를 하나하나 걷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8연대의 전진은 현재의 길갈교 선에서 저지되고 만다. 길갈교 전방과 좌우 고지대에서 쏘아대는 총탄과 포탄에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이곳이 북한군이 화력을 집중시킨 최후 저지선이었다. 현재의 여호와이레 수양관 일대가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의 최후, 최대의 격전지였던 것이다.
“목표 지역에 거의 도달하여 개활지(막힘 없이 사방이 트인 곳:편집자 주)를 통과하는데 사방에서 적의 총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면서 피할 곳이 없어 전우들이 많이 희생됐다” (참전 용사 문세훈, 김익수, 오병철, 이순재 증언)
전세를 타개한 18연대 수색중대
이때 전세를 타개한 것이 수색중대였다. 북한군 퇴로를 끊기 위해 오색약수터 북쪽에 침투해 있던 수색중대가 후방에서 북한군을 타격해 들어왔다. 예비대로 따라가던 1대대는 길갈교 부근에서 북한군 옆쪽으로 치고 들어가 협공에 나섰다. 마침내 오후 2시경, 2대대와 3대대가 모두 목표 지역인 마산리 일대를 점령한다. 이 무렵 비가 그치고 날씨가 개었다. 18연대의 점령 작전이 워낙 빠르게 전개됐기 때문에 많은 적군이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채 일대에 갇혀 있었다. 항공지원에 나선 미군은 도주하는 적군을 대대적 폭격으로 격멸했다. 설악산 산악지대로 도주하는 적군은 조준 사격으로 소탕했다.
“비가 오는데 참호를 파고 대기하고 있었다. 공군에 지원 요청을 해서 폭격을 하니까 적군이 도망해서 산으로 올라오는데 ‘딱 콩’ 쏘니까 푹 쓰러지고 푹 쓰러지고, 그때 중공군 군단을 전멸시키고, 다시 내려와서 오색국민학교로 집결하여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참전 용사 홍현달 증언)
이 승리로 국군 1군단은 5월 26, 27일에 걸쳐 양양을 빼앗고 계속 북진해 29일에는 고성군 간성읍을 점령한다. 그리고 6월 14일에는 고성군 일대를 모두 확보한다. 현리 전투 이전에 인제와 속초를 잇는 선에서 형성됐던 전선이 오히려 18일 만에 향로봉과 금강산 일대까지 무려 69km나 치고 올라간 것이다. 5월 말까지 화천저수지-양구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한 중부 전선의 미군 10군단이 동부 전선의 국군 1군단의 진격 속도에 맞추지 못하자,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전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 캔자스선’을 설정하고 국군의 진격 속도를 조절해야 할 정도였다.
“오색에서 나와서 양양을 거쳐 고성까지 차를 타고 돌진했다. 군단에 가서 현리 전투에서 패전한 것이 아니라 18연대가 오색전투에서 승전했기 때문에 현재 전선이 있는 것이기에 승전이라고 말했다. 통일전망대가 있는 곳을 넘어 북측 고성 시내까지 시가지 전투를 하면서 점령해 들어갔다. 인민군이 있었지만 우리가 물고기를 잡고 있어도 대항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억울한 것은 휴전 협상을 한다며 공격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코앞의 금강산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참전 용사 홍현달 증언)
이때 졌다면 설악산도, 주문진도 없었다
이때 형성된 전선은 휴전 협정을 통해 현재의 휴전선으로 그대로 고착됐다. 6ㆍ25 전쟁 이전의 38선보다 80km나 북쪽으로 더 올라간 것이다. 만약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설악산 전체와 속초, 양양, 고성, 인제가 북한 땅이 됐을 것이다. 오색 여호와이레 수양관도, 주문진 해변교회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기간, 중부 전선에서도 대승의 소식이 전해졌다. 국군 6사단은 사창리 전투의 대패(4.21-24)를 설욕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철모에 ‘결사’를 새겨 넣으며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5.16-29). 북쪽으로 강원도 화천까지 적군을 추격해 파로호 전투까지 이어지는 동안, 중공군 3개 사단이 궤멸되고 21,550명이 사살됐다. 동부 전선에서는 18연대를 필두로 한 국군 1군단이, 중부 전선에서는 6사단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북한군과 중공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고, 6ㆍ25 전쟁의 승리를 단념하고 만 것이다.
고성 170고지 전투
3사단은 6월 15일 11사단으로부터 동해안 일대의 작전 지역을 인수하고 고성 일대에 배치된다. 이에 따라 오색과 마산리 일대에서 남은 적군을 소탕하던 18연대도 고성 일대로 이동했다. 국군의 북진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북한군과 중공군은 체계적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우리 작전 지역에서 본대와 접촉이 끊긴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국군 각 부대의 수색 정찰부대들은 위력 수색작전을 빈번하게 벌였다. 위력 수색은 일부러 적을 위협해 사격이나 출동하게 함으로써 배치 상태와 전투 역량을 확인하는 작전이다.
18연대 수색중대도 내금강 일대까지 진출해 위력 수색작전을 벌였다. 6월 17일 아침 8시, 18연대 수색중대는 고봉리 일대의 전초 진지를 출발해 구읍리 전방 신계천을 따라 하초현, 초현리를 거쳐 전진했다. 오후 5시경 202고지 일대에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은 일절 반응이 없었다. 202고지는 피아간 밀고 밀리는 전투로 양측이 구축한 진지가 산재한 곳이었다. 그러나 적군은 이날 낮 동안 18연대와 22연대 수색중대의 위력 수색을 면밀하게 추적,감시하고 있었다. 18연대 수색중대가 202고지에 배치된 것을 확인하자 신계천 근처에 있던 북한군 15사단 1개 대대가 은밀히 도하해 202고지를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6월 18일 새벽 4시였다. 30분간 포격이 쏟아지자 수색중대장 문세훈 대위는 아군의 포병사격을 요청했다. 30분간의 포병 사격 후 적은 사면에서 돌격해 왔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다. 문세훈 수색중대장은 최후 단계로 진내 사격(아군 진영에까지 포격하라는 것)을 요청했고, 마침내 진내 사격이 개시된다. 202고지 정상 부근까지 진입했던 적군이 40분 후 퇴각을 시작했다. 날이 밝고 확인한 결과 북한군 41명이 사상을 입었고, 18연대 수색중대는 97명 가운데 14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수색중대가 철수조와 엄호조를 편성해 철수하던 중 오전 10시 반경 170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1개 중대가 다시 공격해 왔다. 11시경 북한군은 대대 규모로 증강돼 포위 공격을 벌였다. 18연대 수색중대는 항공 지원을 요청해 구읍리 일대에서 증원되는 적을 차단하고, 포병 사격으로 적군을 타격하면서 필사적인 철수 작전을 벌였다. 마침내 오후 2시 40분, 처음 출발했던 고봉리까지 철수를 완료했다. 중대원 97명 중 총 32명이 전사했고, 17명이 다쳤다. 청년 장교 박윤식도 170고지에서 대퇴부에 심한 총상을 입고 철수하지 못했고, 사흘 만인 6월 20일에야 아군에 의해 구출됐다.
“한참 총을 쏘아대고 있는데 왼쪽 허벅지가 ‘퍽!’하더니 도끼로 맞은 것 같아요. 인민군이 ‘드르륵’ 쏜 기관 포탄에 맞은 거지요. 총탄에 맞으니까 뭐가 뜨끔해요. 그러더니 맥이 하나도 없어요. 이건 맞아본 사람만 알아. 보니까 군복이 다 터지고 살이 홀랑 까졌어요. 왼쪽 허벅지 3분의 2가 떨어져 나가다시피 했습니다. 다리가 홱 돌았어요. 뼈가 다 부러졌고 살도 거의 다 떨어져 나가고 피가 막 솟아요. 인민군은 몰려오는데 부대가 살아남으려면 전투는 해야 하고, 그러니 겨우겨우 기어서 칡넝쿨을 끊었습니다. 상처 부위를 일곱 번 이상 감아서 묶은 후 오후 2시 40분경까지 고통을 참아가며 이를 악물고 싸웠습니다.하다 하다 안 되니까 다른 전우들은 인민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고 하는데, 저는 도저히 걸을 수도 뛸 수도 없고 해서 탈출하는 전우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나까지 데리고 나가다가는 다 죽으니까 날 놓아두고 먼저들 빨리 빠져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위 틈에서 숨어 지내는데 전투를 안 하고 긴장이 풀어지니까 통증이 막 밀려와요. 3일 동안 피가 얼마나 났겠습니까. 나중에는 여름날에 썩으니까 쉬파리가 달라붙어요. 피가 빠지니까 첫째 추워요. 얼마나 추운지…. 그 쑤시고 쏘는 것은 말도 못 해. 온몸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이 아파요. 도끼로 아예 다리를 찍어 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머리가 터지는 것 같고 수박 짜개지듯 막 터지는 것 같아요.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극심한 부상과 출혈 후유증으로 구출된 후에는 얼마간 기억상실증까지 겪을 정도였습니다. 또 3일 동안 얼마나 목이 마르는지, 물 한 모금만 먹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시간이 갈수록 정신은 혼미해지고.
그러다 6월 20일이 되니까 아군 부대가 반격을 해오는 바람에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습니다. 총 맞은 다리를 잘라야 하는데 마침 가까이 있던 미군 대대 의무대로 후송됐어요. 자르면 한 달이면 완치되는데 자르지 않으면 6개월 이상 걸립니다. 그러다 보니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밀려드니까 무조건 자르는 거예요. 미군 의무 장교가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고향이 어디냐?” “이북이다!” “형제가 있느냐?” “4대 독자다!” 제가 다리를 자르면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르지 않은 것입니다. 다리를 놓아두고 대신 쇠심을 박아서 연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도 500미터를 걷지 못해요. 걸으면 몸 뒤에서 발까지 뻗정다리야. 뻣뻣해지고 어깨가 뻐근해집니다.
1년여 동안 육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다 플라스틱으로 하지만 그때는 쇠로 박았어요. 60여 년 동안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다리가 무겁습니다. 다리를 들고 내릴 때마다 아프고, 계단 내려갈 때는 두 사람이 붙들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 병원에 가서 쇠를 빼고 플라스틱으로 넣으려고 하니까 의사들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수술을 해도 힘줄을 건드리면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그냥 앉아서 죽게 된다.”는 거예요. 이 쇠가 닳아서 어떤 때는 걸으면 삐그덕 삐그덕합니다. 제가 인민군, 중공군과 전투할 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나라가 위급하니 국가의 지상(至上) 명령에 의해서, 적과 아군 간에 소중한 생명이 죽고, 죽여야 하는 일을 했습니다. 절박한 싸움터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군에서 나와서 “비록 쇠다리이지만 이제는 나라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습니다. (양양-오색-고성 진격전 자료집(사단법인 백골전우회 발행) 중 박윤식 증언)
국가의 운명을 가른 현장마다
청년 장교 박윤식은 전역 후 목회자로 헌신하며 평강제일교회를 비롯한 국내외 300개 교회를 세웠고, 세계적 기독교 베스트셀러인 구속사 시리즈를 집필했다. 그는 6ㆍ25 전쟁과 빨치산 토벌을 위해 자신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 현장마다 훗날 교회를 세웠다.(서울 오류동, 오색, 주문진, 하동, 구례 등) 그는 6ㆍ25전쟁에서 국가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전투 때마다 현장에 있었다. 북한의 남침 첫날에는 최전방 개성의 토성, 여현지구에서 적을 맞았고, 북한군의 서울 진주 직후에는 한강 방어선에 있었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을 때는 안강, 기계 전투, 그리고 압록강 진격 후 다시 철수한 뒤에는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에 참전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평생을 바친 그의 6ㆍ25전쟁 마지막 전투가 6월 17일에 시작돼 18일에 끝난 것, 17인의 부상 장병에 속해 사흘간 사투를 벌인 것, 그리고 그 장소가 170고지인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양양-오색-간성 진격전 73주년 기념식 성대하게 치러져
6ㆍ25전쟁 전사(戰史)에서 국군의 현리 전투의 대패는 크게 부각돼 있지만,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뿐 아니라 전쟁 전체의 승패를 가른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은 이상할 만큼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그러나 백골전우회 등이 끈질기게 사료(史料)와 증언을 발굴한 결과, 최근에야 비로소 이 전투의 역사적 중대성이 세상에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전투 73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5일(토) ‘백골부대 양양-오색-고성진격전 승전 기념식’이 3사단과 백골전우회 주관으로 양양군 서면 여호와이레 수양관3)에서 열렸다. 이곳은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의 승패를 가른 바로 그 격전지이다. 전투의 약사(略史)가 보고됐고 백골사단가가 제창됐다. 여당에서는 호준석 국민의 힘 대변인이 참석해 축사를 했고, 인기 가수인 금방울자매와 Y2K 리드 보컬 고재근이 ‘전우야 잘 자라’,‘전선야곡’,‘굳세어라 금순아’ 등 6ㆍ25 전쟁을 기억하는 노래로 그날의 희생과 헌신을 기렸다.4)
3) 여호와이레 수양관의 구속사적, 근현대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참평안 2020년 9월호 ‘여호와이레의 구속사’ 참조 (http://champyungan.com/blog/archives/7657)
4) 휘선 박윤식 목사의 6ㆍ25전쟁 참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참평안 휘선특별호 제4권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한 길에서 만나다’, ‘국가의 존망 가르는 현장마다’, 참평안 2020년 9월호 ‘노병이 증언하는 오색 전투’ 참조 (http://champyungan.com/blog/archives/7608)
강원도 양양군 오색_참평안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