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 60주년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초기 성도들의 노고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 전수한 신앙’
개척 60주년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초기 성도들의 노고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 전수한 신앙’
「구속사 시리즈」의 출발점은 지리산 동굴이라 할 수 있다. 자자인 휘선 박윤식 목사는 3년 6개월 목숨을 건 기도 가운데 성령의 강한 조명으로 셩경을 깨닫고 시리즈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하산 이후 처음 말씀을 전한 곳은 전북 익산으로 알려진다. 이로부터 ‘말씀 교회 60년’은 이 말씀을 듣고 배우고 지켜온 성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절, 특별히 말씀을 지켜온 한 집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장이경 권사(2016년 88세로 소천)의 자녀, 안성희 권사를 통해 그 시절을 들어보았다.
일석교회(평강제일교회 전신 1971~1977년)가 생기기 전, 휘선 박윤식 목사님이 익산에 직접 오셔서 말씀 증거하셨을 때 내가 중학생이었어. 사람들이 많이 모였었지. 원지동 수양관 세우신 뒤로는 자주 못 내려오셨는데, 모이는 수가 줄었어도 끝까지 남은 사람들 중에는 서울까지 올라가 예배드리고 오는 분들도 있었어. 쉽지는 않았어. 안 믿는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거든. 견디다 견디다 버티지 못하고 많이들 떨어졌어.
엄마도 아버지한테 많은 핍박받은 걸 우리 남매들이 보고 자랐으니 잘 알지. 그래도 묵묵히 감수하시고 끝까지 인내하고 지켜내는 엄마의 그 믿음을 보고 우리 자매들의 신앙이 자라난 것 같아. 아빠가 그렇게 핍박해도 설악산 여호와이레 수양관 갈 때는 자식 한 명이라도 되는 대로 데리고 다니셨어. 다녀와서 많이 느끼고 오잖아.
옛날에 박 목사님이 익산으로 아침에 내려오시면 늦은 밤까지 성경을 가르치셨어. 침대 열차 표를 끊어드리면 주무시면서 저녁 늦게나 서울로 귀가하시곤 했으니까. 식사나 제대로 챙겨 드렸나. 가난한 시대였잖아. 큰 양푼에다 밥을 비벼가지고 다 같이 숟가락만 꽂아서 드셨어. 서울로 직접 올라갔다 오시는 분들은 대단한 분들이었지. 어디서 말씀 주신다 하면 그냥 그 길로 올라가니까. 쌀이나 김치 등 보따리를 싸가지고 며칠 또는 일주일 만에 내려오는 사람도 있었으니 좋다고 하는 가족이 몇이나 되겠어. 갈 때는 신나게 갔는데 집에 돌아오면 남편들이 무서운 거지. 그렇게 1세대는 진짜 핍박 많이 받고 신앙생활 하셨어. 어린 마음에도 불쌍했어. 남편이 막 뭐라 그러면 멀리 도망가는 거야. 돌아 오면 두들겨 맞았지. 맞은편 이웃집 아저씨는 칼도 집어던지고 그랬어. 그러면 아주머니가 우리 집으로 피신 오기도 하고, 숨고 도망다니다가 우리가 담 넘겨 드리고 별짓 다 했어.
우리 엄마도 젊었을 때는 무지하게 맞았어. 아버지가 얼마나 사나운지 자식들이 엄마 그만 때리라 말해도 소용없었어. 오죽하면 동생은 ‘아버지가 나가서 차에 팍 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는데, 어느 날, 엄마 따라 (일석)교회를 갔는데 박 목사님이 동생보고 그러시더래. “야, 너 그렇게 아빠 미워하지 마! 어떻게 아버지가 차에 탁 치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동생이 순간 놀라서 엄마한테 ‘엄마가 목사님한테 일렀느냐’고 물었대. 엄마도 당연히 처음 듣는 얘기였지. 동생도 누구한테도 하지 않은 얘기였으니까. 너무 놀랐었대.
아빠는 생활비를 안 주셨어. 돈 가지고 전부 서울로 교회 다닐까 봐. 학생인 나한테는 생활비를 조금 주셨는데 엄마한테는 10원도 안 주셨어. 그러면 나는 그 돈을 엄마한테 살짝 드리고. 그렇게 참 어려운 생활…(울먹이며). 2016년도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 돈 한 푼 만져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옷도 못 사 입고 먹을 거 못드시고…나중에 우리들이 어른이 돼서야 하나씩 사드리고 했지. 돈을 쓸 줄을 모르는 분이야. 돈이 없었으니까. 그저 오직 말씀의 길 하나만 보고 참 어떻게 그렇게 목숨 걸고 믿으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셔. 엄마는 정말 목숨 걸고 말씀을 사수하셨어.
이런 일도 있었어. 내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수련회 기간이었어.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수련회 기간 다 마치고 말씀 다 듣고 내려 오시겠다는거야. 그렇게 말씀을 받으시면서도 아둔해서 깨닫지를 못했다고 늘 말씀 하셨지. 엄마가 성경공부 하러 서울 올라가시면 우리 자매들은 집에서 아버지와 오빠들 식사 챙겨드리고 살림을 했어. 당시 교회는 아직 없고 박 목사님도 맨날 서울-익산 왕복할 수 없으니 우리 집을 성전 삼아 오랫동안 예배를 드린 적도 있었어.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
그렇게 반대했던 아버지도 마음이 바뀌시더라고. 엄마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품,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그런 것 때문이었나 봐. 어느 때부터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 청소를 싹 해 놓고 예배드리라고 하시고는 당신은 나가시더라구. 때려도 안 되고 뭘 해도 안 되겠다 싶으니까 당신도 지치셨나 봐. 포기한 거야. 익산에 온유교회가 생겼을 때는 아빠가 하신다는 소리가 “나는 네 엄마 치맛자락 잡고 천국에 따라갈 거야.” 그런데 정작 당신이 엄마한테 한 행동이 있으니 양심에 걸리잖아. 말하면서 엄마를 힐끔 보시고는 “그러면 당신이 나를 발로 차서 떨어뜨릴 건가?” 하고 눈치를 살피셔. 그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박장대소했던 게 떠오르네. 지나고 나니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아빠는 엄마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셨지.
그런 엄마도 박 목사님 옆에 가실 땐 벌벌 떨었어. 한번은 물어봤어. ‘엄마는 왜 목사님을 무서워해? 젊었을 때 다같이 한 양푼에다가 숟가락 꽂아 밥먹던 사이라며?’ 기도하시는 분이라 무서우시대. 엄마가 그렇게 말씀의 길을 가셨지만 아직도 엄마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우리 결혼 문제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여쭤 보지 않았다는 거. 나하고 둘째 동생이 믿지 않은 남자 만나 결혼했는데 둘 다 형통치 않았거든. 엄마가 전적으로 말리지 않으셨어. ‘결혼’ 정말 중요하잖아.
평강제일교회가 생기고도 엄마는 한동안 서울로 다니셨어. 기차비 아끼려고 항상 입석으로 끊고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 그렇게 다녀오시는 거지. 힘들게 서울가서 말씀을 받아 가지고 오면 처음에는 가정 예배 식으로 하시다가, 서서히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모이게 되고 점점 많이 모이게 되었지. 모두들 귀 기울여 잘 들으셨어. 지금의 교회 출석 인원보다 그때 모인 분들이 더 많았어. 엄마가 서울서 노트필기 하신 거 그거 보고 가르쳤지. 그 후에는 녹음기를 들고 다니셨어. 서울까지 가셔서 밥이나 제대로 사 드셨겠어? 입석 기차 타고 다니는 판에. 가서 점심 한 끼 제대로 사 드시지도 못하고. 익산 집 내려와서나 아빠 눈치 보며 잡수시고. 옛날에는 절약 안 하고는 살 수가 없었잖아. 엄마 환갑이라고 금팔찌 하나 해드렸는데 어느 날 보니 없어. ‘엄마 그거 팔찌 왜 안 끼고 댕기시냐’ 했더니 건축 헌금하셨다고. 그렇게 본인을 위해서는 쓰시는 게 없었어. 그렇게 열성적으로 다녔던 사람들이 자손들한테는 그 말씀을 잘 전하지 못했어. 신앙 전수,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껴. 이스라엘 백성이 세렛시내 건너기 전 다 죽고 두 명만 살았잖아.
안국희 권사(막내 딸) : ‘말씀의 승리가’라고 있지? 박윤식 목사님이 작사하거나 개사한 노래들. 엄마가 그 책 펴 놓고 우리 자매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따라 부르라고 그러셨어. 어렸을 때부터 가사를 거의 다 외었지. 녹음기도 몇 대를 버린지 몰라. 하도 들으니까. 설교 말씀 카세트 테이프 듣고 녹취하고, 재생 버튼 누르고 받아 쓰고, 일시 정지 했다가 또 받아 적고. 얼마나 인내력이 필요한 작업이었겠어. 설교 말씀 한시간 짜리라도 몇 시간이 소요되는 거지. 그렇게 받아 적은 걸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고 그런 거지.
그 작업을 힘들어 하시길래 어느 날은 어린 내가 대신 써 주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웃어. 박 목사님이 틀니를 하셔서 발음을 알아 듣기 어렵고 또 이북 사투리도 쓰셨기 때문에 아무나 녹취 작업을 할 수가 없었거든. 엄마만 할 수 있는 작업이었어. 그렇게 빼곡히 옮겨 적은 걸로 공부하고 예배드리고 그랬었지. 지금 생각해도 그 끈질긴 인내력 하나는 어린 마음에도 대단하다 생각했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엄마들은 원래 그런 인내력으로 살아야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나 봐. “엄마같이 살아야 되는 게 ‘엄마’라면 나는 엄마 못할 것 같애”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엄마가 웃곤 하셨어. 이런 걸 보고 아빠 같은 사람도 무릎을 꿇은 것 같아. 나중에는 아버지가 안 믿는 아들들한테 그러셨어. “너희들은 엄마가 믿는 신앙을 따라가야 된다”고. 그렇게 반대하시더니.
엄마가 병상에 계실 때 내가 박 목사님 찾아 뵙고 기도 부탁을 드렸는데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 묻지도 않으시고는 “그 나라가 더 좋지, 여기가 뭐가 좋냐” 그러시는거야. 순간 인간적으로 너무 섭섭하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뜻은 생각도 못했지. 엄마가 마지막에 엄청 고통스러워 하셨는데 계속 연명 치료를 했어. 엄마 돌아가시고 얼마나 울면서 후회했는지 몰라. 내가 말씀 듣고 기도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면 엄마가 고생 안 하시고 가셨을 텐데. ‘평생 하나님만 바라고 고생하셨으니 엄마를 조금만 더 살려 달라고’ 붙잡는 바람에…. 박 목사님은 그런 내가 시험 들까 봐 직접적인 말씀을 못하신 것 같아. 환자인 엄마는 이미 생사를 초월하셨는데 딸은 엄마를 놓고 싶지 않으니까. 박 목사님이 이런 말씀까지 하셨어. ‘네 엄마는 남의 것까지 가져다가 살았다‘고. 원래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해서 오래 못 산다 했거든. 그런데 88세에 돌아가셨잖아.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 살았다는 걸 귀띔받고도 딸은 깨닫지 못해 그렇게 살려 달라고 졸랐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기도하는 목사님 말씀 안 듣고 거역하고 섭섭해 했던 게 너무 죄송해서 늦게라도 순종하며 살려고 했더니 이젠 목사님이 옆에 안 계시네. 말씀으로 만나야지 인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어떻게 헤아리겠어.
우리 자매들이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인품 때문이었던 거 같아. 엄마가 믿는 하나님이면 정말 신실한 하나님이 계시겠다. 아빠도 그게 믿어지니까 엄마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간다고 고백한 거지. 만약 가난이나 핍박에 지쳐서 엄마가 흔들렸다면…
아빠 직업은 세무사였어. 2층 세무사 사무실에서도 사람들 모아 놓고 아빠 몰래 성경공부 한 적도 많았지. 그때는 변화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단이라고 그러니까 못 꺼내시다가 다시 거둬들이시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공개적으로 다시 변화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잖아. 당시는 때가 안되어서도 그랬겠지만 못 깨달으니 그러셨겠지. 지금은 아카데미나 구속사 세미나든 어디서든 거침없이 선포되잖아. 때가 된 거지. 지금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믿어야 할 때인 것 같아.
취재, 글_권오연
그림_박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