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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

고민의 날

2023.04.24 11:31

고민의 날

마태복음 26:36-56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대제사장,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 장로, 서기관, 유사, 회당장 등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실 때 다 거짓입니다. 가식과 형식, 외식(外飾), 즉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눅 16:14). 과부만 있으면 집을 찾아다니며 재산을 다 가져 갔습니다(눅 20:45-47). 예수께서 준엄한 말씀으로 책망하셨죠. 자신들의 숨은 죄를 끄집어내고 만인간에게 공개하니 예수만 잡아 죽이면 자기 죄 지은 정체, 마음보따리를 교인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했죠.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한 첫째 조건이 갈릴리 촌사람이 올라와서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소동을 일으킨다는 것! 그것이 죄목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 밑에 있는 서기관들이 돈을 혼자 먹겠습니까. 착취해서 제사장과 나눠 먹었죠. 시장에 나가거나 잔치, 모임에 가면 상좌(上座)에서 대접받기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이 다 아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공부 못하고, 손에 생선 비린내 나는 촌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의 제자가 됐다면 하루 아침에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몸 파는 창녀, 토색하는 세리, 죄인들, 배우지 못한 제자들! 양식 있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려다가도 ‘야, 저 제자들 봐라. 불학무식하다. 예수가 학교 다녔냐? 끼리끼리 모이는 것 봐라.’ 했죠. 예수님이 당시 종교의 부패상, 썩어 송장 냄새 나는 것을 폭로하는 것 보세요.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십자가는 이 땅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은혜로운 말씀, 축복의 말씀, 영생의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재창조입니다. 아담 때 창조하셨지만 죄악으로 다 오염됐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새 창조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잘 되고, 잘 되고, 더 잘되고, 천국의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내용을 깊이 압니까. 붙잡고 살아 봤습니까? 십자가의 맛을 압니까? 냄새를 맡아 봤습니까? 음식은 먹어봐야 압니다. 비로소 진가가 평가됩니다. 주께서도 요한복음 6:35 이하의 말씀 볼 때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고, 영원한 구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주의 피를 먹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를 맡아 보고, 십자가를 먹어야 아는 거죠.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주님의 생애 중 가장 고난의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미 예수께서 깜짝 놀라셨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성경에 ‘놀라시며 마음이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 하셨죠. 십자가에 달려서 내일이면 운명하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내 아들이 죽으면 영원히 살릴 수 없죠. 그러나 예수님을 모셔 오면 살아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같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같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외롭게 쓸쓸하게 놓아둔 채 다 도망갔지만, 우리는 뒤늦게 2천년 후에라도 말씀을 통해서 알고 ‘내가 다른 날은 몰라도 고난주간만큼은 만사 제쳐놓고 교회 나가서 주의 음성을 들어야겠다. 주의 심정을 헤아려서 예수의 마음 가지고, 예수님께서 아파하는 것, 나도 똑같은 아픔을 가져야 되겠다.’는 믿음과 결심,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결심 없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마 26:36-46, 막 14:32-42, 눅 22:39-46).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고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유월절 잔치는 집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니산월(정월) 10일에 양을 사서 4일 동안 양을 점검합니다(출 12:3-5). 버짐이나 흠은 없는지, 제대로 먹고 제대로 배설하는지 조사합니다. 겉은 멀쩡해도 배설을 제대로 못하면 병든 양이죠. 병든 것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칩니까. 어린양 예수님도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우리 죄 걸머지시기 위해 부정하신 것 없도록 자신을 조치하면서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눈 뜬 소경 같은 제자들은 주님과의 마지막 모임인데도 모릅니다.
14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양을 잡고, 잡자마자 종발에 피를 담아서 우슬초로 대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릅니다. 그리고 절대 나오면 안 됩니다. 문 닫아걸고 있어야 합니다. 유월절 잔치는 집안에서 하는 거예요. 집안이지만 옷을 다 입고, 신도 신고,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먹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언제 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들이 내려와서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지 않은 바로의 왕궁부터 감옥 간 백성의 집까지, 짐승 첫 새끼부터 사람 첫 자식까지, 아들딸 구분 없이 다 죽였습니다. 애굽 천지에 곡성이 진동했습니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안 죽어야 위로하죠. 어디 가서 위로받지 못해요.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먹다 남은 양을 불에 바싹 태워서 땅에 묻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밀을 깨달을 것은, 아담서부터 왔다 간 많은 죽은 영혼들과, 현재 살아 있는 사람과, 주님 재림할 때까지 앞으로 날 사람들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주님이 지금 애굽 같은 죄악 세상에서 탈출하시고 있습니다.

세례를 못 받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 짊어지신 과거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 세례 받았느냐? 고린도전서 10:1-2을 볼 때, 홍해를 건너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그 모든 사람들이 세례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 받았다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땀과 눈물로 세례 받은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지만 전 인류가 다 주 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오후 6시가 되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聖)만찬이 시작됐죠(요 13-17장, 마 25장). 그 자리에서 고별 설교를 하셨습니다(눅 22장). 그때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당신의 외아들에게 앞으로 당할 고난을 보여 주셨습니다. 몽둥이와 갈대로 등을 맞아서 고랑이 파지고, 수염을 잡아당기고,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뒤 주먹으로 친 다음에 누구인지 맞혀 보라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밤 11시가 됐습니다. 유다는 벌써 나갔죠. 사실은 가룟 유다가 아니었으면 예수님이 더 오래 사셨습니다. 왜? 그 전에 종교지도자들이 모여서 명절 전에는 예수를 죽이지 말자고 결의했습니다. 결의가 끝나고 헤어지려는 찰나, 가룟 유다가 와서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인건비였던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주님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얼마나 민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머지 열한 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틈만 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가실 데가 어디 있었습니까. 그러니 예루살렘 거리를 여기저기 헤메다가 피곤하시면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던 것입니다. 제자 8명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평상시 보시면 다 아시죠. 그래서 8명은 겟세마네 동산 밑에 두고 셋만 데리고 가셨습니다.(마 26:36) 가셔서 주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내가 깜짝 놀랐다.” 제자들이 주의 얼굴을 보니 그 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겁먹은 것도 같고, ‘뭔가 닥치려는가? 왜 저렇게 무서워하시지? 심상치 않구나.’ 했습니다. 예수께서 세 제자에게 돌 던질 만큼 거리에서 ‘너는 여기, 너는 저기’ 지정해 주시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셋만 갔습니다(막 5:37). 다볼산(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도 셋만 갔습니다. 세 제자는 예수님의 빛난 승리와 멸시와 굴욕의 모습들을 보았기에 ‘나를 도울 수 있겠지.’ 하고 데려가셨습니다. 주님도 인간인지라 불안과 공포를 순간순간 느낍니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큰 쇠망치로 톱날같이 우툴두툴한 못을 손과 발에 박는 것을 예수님이 보고 계시는 거예요. 깜짝 놀라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도록 하자꾸나.”(마 26:38, 막 14:33-34). 이것도 마음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시편 42:5-6 말씀을 이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시편 42:5-6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남겨놓고,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흙이 별로 없습니다. 다 돌이에요. 그대로 꿇어앉아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할 정도로 예수님의 마음이 고민되고 두려웠습니다. 고난주간에 주의 그러한 심정을 한 번 헤아려 봤습니까? 주님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기드론 시내를 건널 때 혼자 찬송 부르면서 가시는 모습 보세요. 주의 마음이 편안해서 찬송하겠습니까(요 18:1, 마 26:30). “멸망 받은 자식, 유다 하나 외에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생명들을 내가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말씀한 그대로 다 찾아 가십니다. 주님 오신 목적(마 9:13)이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 아닙니까(눅 19:10).
첫 번째 기도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줄 수 없습니까?”. 예수님은 인성(人性)을 가지신 분입니다. 신성과 인성이 다 있는 분입니다. 육신이 있는 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내게서 이 잔, 십자가를 지지 않고 좀 떠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귀가 손뼉을 치려는 찰나에, 우리 주님께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내려다보고 있잖아요. ‘할렐루야, 아멘’ 환성을 질렀습니다(막 14:35-36). 천사가 보고 있었으니 예수님이 세 번째 기도에서 승리하신 후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을 수종(隨從)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땅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실 때 가만히 얌전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마 26:39). 엉엉 우시면서 이마를 땅에 대고 왔다갔다 할 때 다 껍질이 벗겨진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모두 걸머지신 예수님입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기도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나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난주간에 교회에 안 나옵니까. 땅의 일 해봐야 남는 게 없습니다. 세상 일은 다 지나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은 영원히 남고 거합니다(요일 2:17).
성도 여러분! 이 시간 고민하고 괴로워하시는 예수님을 쳐다보세요. 제일 괴로운 것이 뭔지 압니까? 고독이에요. 고독하신 예수님을 한번 쳐다보세요. 얼마나 괴롭고 고독했으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둬 달라’고,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셨습니까. 사단이 ‘우리가 이겼다’ 하고 만세 부르기 직전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아버지께 맡기는 모습! 아버지 소원대로, 마음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세 번 반복됐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모습을 보고 “그 육신으로 계시던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을 향하여 크게 부르짖고 눈물 흘리시며 간구하며 탄원하셨으며, 그의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그의 간구를 들으신 바 되었다.”(히 5:7)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아들이시라도 받으실 고난으로 복종을 배우셨고, 그 때문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히 5:8-9) 잊지 마세요. 4복음에 미처 기록 못한 당시의 사정, 광경, 내용을 사도 바울에게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초지일관이죠. 첫째, 로마서 5:19 을 볼 때 예수의 순종과 아담의 불순종을 대조하고 있죠.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죄와 사망과 타락과 죽음과 심판을 주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므로 구원과 생명과 은총을 전 인류에게 안겨주었습니다(롬 5:12). 그래서 빌립보서 2:8에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발의 먼지보다 더 낮아질 정도로 낮추셨습니다. 둘째, 히브리서 5:8에 예수님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통당할 때 다 내동댕이치고 도망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요, 주님의 영원한 삶이 나의 영원한 삶이 되는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몇십 년 살다가 죽도록 임시변통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두고 창조하셨습니다(전 3:11). 순종은 하나님 나라의 근본, 근원입니다. 수많은 제물보다 순종이 낫습니다(삼상 15:22-23).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는 것은 사신(邪神) 우상(偶像)에게 절하는 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첫 번째 기도하신 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와 보니 자고 있었죠. 베드로를 향해 “베드로야 너는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하셨습니다(마 26:37-46, 막 14:32-42). 제자들의 눈꺼풀이 붙어 잠이 든 것입니다. 기막힌 일이죠.
예수님이 다시 가셔서 두 번째 기도하십니다.
“나의 아버지여, 내가 마시지 않고는 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라면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참으로 멋있습니다. 두 번째 일사각오, 결사의 기도! “나의 아버지여, 내가 마시지 않고는 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라면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손뼉 치려던 마귀는 손을 내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인류의 죄를 걸머진 내 아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과 고민과 번민과 고생 속에도 십자가를 걸머지겠다고 기도하는구나.’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에게만 지우는 형벌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도를 비교해 보면 예수님이 순종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몸부림치셨는지가 눈에 선히 보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다시 와보니 제자들은 또 자고 있었죠? 그대로 두시고 세 번째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 기도가 말도 못하죠. “사자(使者)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눅 22:43-44)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 마지막 세 번째 승리기도할 때 너무 기뻐서 도와주는 것을 보세요. 고난주간에는 모든 걸 끊으시기 바랍니다. 약속 다 뒤로 미루세요. 기가 막힌 장면들 아닙니까.
첫 번째 기도가 끝난 뒤에는 자고 있던 제자들을 책망하셨고, 두 번째 기도가 끝나고 오셨을 때는 침묵하셨습니다. 세 번째 오셨을 때는 “이제 그만이다 자고 쉬라.” 하셨죠(마 26:45, 막14:41).
‘고맙다. 자지 않고 깨어 기도하고 있구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자.’ 우리는 이런 말을 들어야죠. 그때 제자들이 같이 기도하고 있었다면 자고 쉬라고 했겠습니까? 손 붙잡고 ‘승리했다! 하나님께 아멘 할렐루야 만세 부르자!’ 그랬을 것 아닙니까? 2,000년 전에 제자들은 그랬지만, 2,000년 후에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주님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 기도하는 장소까지 가서 자신과 주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주님이 보시고 ‘너 한국에서 왔구나! 평강제일교회 교인이구나 고맙다!’ 하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교회 나오라는 겁니다. 고난주간에 은혜 받지 못하면 평생 은혜 받지 못합니다. 고난주간에 은혜 받아야 주일이 기다려지고, 수요예배가 기다려지고, 목요일에 내 자신과 가족과 국가, 민족 위해 기도하는 것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에게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줄 유다가 가까이 왔다.” 하셨죠(마 26:47-56, 막 14:43-52, 눅 22:47-54, 요 18:3-12). 제자들은 긴장과 공포에 떨다가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겼는지 아십니까. 젖 떨어진 강아지가 어미에게 오듯이 주를 의지하는 모습을 보세요. 비록 기도에서는 졌지만, 그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이 흐뭇하셨습니다. 어느새 새벽 1시가 좀 지났습니다. 예수님과 가룟 유다가 어두운, 빛 없는 동산 어귀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참으로 쓸쓸한 만남입니다. 말이 안 나오는 만남, 비극의 만남이죠. 이때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세요. 사람이 기분이 나쁘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 XX야, 너 왜 왔어?’ 그러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아 죽이는 유다가 와서 입 맞출 때, ‘유다야. 너는 내게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 하느냐?’ 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유다의 이름을 불러 옛 기억을 되살려, ‘너 지옥 가면 안 되지 않느냐. 네가 나를 팔아먹었어도 회개하고 돌이켜라.’하신 것입니다. ‘너 이놈!’ 하지 않고, ‘유다야!’ 하신 것은 다정하고 다감하고 사랑의 향기가 물씬 풍겨 있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입맞춤은 사랑의 표징이죠. 존경, 대접, 은혜의 표적입니다. 그런데 입맞춤을 예수 팔아먹는데 써먹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해요? 시편 2:12에서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유다는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커집니다. 칼과 몽치 부딪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겟세마네 동산을 흔들어 댑니다. 유다가 자신이 입 맞추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군병들과 암호를 짰기 때문에 그들이 숨어 있다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밤에 장안산, 지리산에서 기도하다 보면 가랑잎 하나만 굴러가도 깡통 소리가 납니다. 수십 명이 다가오는데 밤공기를 흔들어대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벌써 아십니다. 아버지 말씀 순종하겠다고 이미 결심했죠. 딱 나가서 “여보시오! 누구를 찾소?”
“나사렛 사람 예수요!” “바로 나요.” “내가 그 사람이오!” 두 번째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에 무서운 공기가 감돕니다.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예수를 잡으러왔던 장정들이 갑자기 땅에 엎드려졌습니다(요 18:5-8).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 앞에 육신의 생각, 육신의 모든 일, 육신의 몽둥이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요 18:5-8).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 앞에서 앞으로 남은 세상도 다 사라지고 날아가고 엎드러진다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잡으러 왔던 자들이 한 풀 꺾여 뒤로 물러나서 겁을 먹고 놀란 토끼눈으로 살폈습니다. 예수님이 피하실 수 있죠. 그러나 고난의 길을 걷기로 하신 분입니다. ‘인류의 죄를 걸머지러 오셔서 다 찾았는데 유다만 잃어버렸다.’고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계시잖아요(요 17:12). 누구를 찾으십니까? 주님 마음 가운데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요 10:11)는 말씀을 품고 있었습니다.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요 10:17) 하신 말씀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뤄지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알았습니까?
“내가 그 사람이라. 나만 잡아가라. 내 열한 제자 손대지 마라. 너희들 빨리 가라”. 말로만 사랑하신 게 아니라 자기가 잡혀서 처참하게 죽을지언정 ‘내가 사랑하는 제자만큼은 빨리 보내달라.’ 하시는 모습입니다. “내가 나사렛 예수라 하지 않았느냐. 나만 붙잡으면 되지, 이 사람들을 왜 노려? 보내 줘.” 고꾸라졌던 장정들이 이 말씀에 겁을 먹고 제자들을 가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이 도망간 것입니다.
드디어, 원수의 손이 예수를 붙잡았습니다. 나병 환자, 곱사병 환자를 고치고, 죽은 자에게 얹기만 하면 사랑이 전달되고 은혜가 전달되고 생명이 전달돼서 살아나게 하신 예수의 그 손이, 죄인의 손에 묶여서 꼼짝 못 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달리다굼” 하실 때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어린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실 때 얼마나 축복받았습니까. 그 손이 오늘밤 묶임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아들딸이 무엇인가 잘못을 해서 경찰의 포승줄에 손이 묶여 있다면 가만히 있겠어요? ‘선생님, 풀어주세요. 순경 양반’ 하며 애원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나의 창조주가 묶이셨는데 오늘 집에 있었다면 큰일날 뻔 했죠. 오늘 나온 여러분들 축복 받나 안 받나 보세요. 반드시 받습니다.
지금은 어둠의 때입니다. 죄인들의 부정한 손에 창조주 하나님의 손이 묶였습니다. 무섭습니다. 한 제자가 검을 뽑아서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주께서는 그 귀를 주워서 훅 불고 닦아서 다시 붙여 주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검으로 쓰는 사람은 검으로 망한다.” 끝까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눅 22:51, 마 26:52). 천사를 동원해서 다 죽이실 수도 있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것을 보세요. ‘내가 이렇게 당하지 않으면,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 언제 이뤄지느냐. 나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데 내가 순종해서 이룩해야 할 것 아니냐.’ 하셨습니다(마 26:53-54).

말씀대로 오시고, 말씀대로 사시고, 말씀대로 일하시고, 말씀대로 가신 분입니다. 우리 평강교회가 말씀대로 일하다가 말씀대로 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2002년 3월 28일(목) 고난주간 특별집회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 2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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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5 The Rules for Spiritual Leaders – 1 Corinthians 4:1-2; Romans 15:1-2 2026.09.22
2954 Foreword 2026.09.22
2953 참된 광복 ‘나’로부터의 개혁이 있어야 2026.09.01
2952 ‘열방을 향하여 구속 경륜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의와 영광의 빛을 발하자’ 2026 하계 대성회 2026.09.01
2951 성막 화첩의 인기에 힘입어 번역 출간된「신묘한 영광의 비밀, 성막과 언약궤」 구속사 시리즈 제9권 영문판·일어판 출판 감사예배 2026.09.01
2950 “구속사 시리즈”는 한국 교회를 통해 전 세계에 주는 엄청난 선물 2026.09.01
2949 “구속사 말씀으로 구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보게 됐습니다.” 2026.09.01
2948 구속사 시리즈 9권,「신묘한 영광의 비밀, 성막과 언약궤」서평 마크 마이어, 마르첼-발렌틴 머첼라루 박사 2026.08.31
2947 셀 수 없을 만큼 널려 있는 은혜의 이모저모 2026.08.31
2946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생활 – 이사야 55:6-11 2026.08.31
2945 포토뉴스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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