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최고의 지휘관을 만났습니다” – 6·25 참전용사 이규설 예비역 대령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최고의 지휘관을 만났습니다”
6·25 참전용사 이규설 예비역 대령
교회를 ‘질서’로 진단하고 바라보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우선 ‘질서의 하나님’을 깨닫기가 오랜 교회 생활로도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도 그런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항오(行伍)를 지어 애굽을 떠나게 하신 것으로, 40년 광야생활 진(陣)의 배열을 규정하고 일일이 그 규범과 율례를 반포하신 것으로도, 하나님은 스스로를 ‘질서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셨다. 이규설 성도는 딸(이옥경 평강제일교회 전도사)의 인도로 교회에 처음 나온 날, “교회가 절도가 있구나”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는 1992년 이옥경 전도사의 임직 때 교회에 첫걸음을 한 뒤 1996년 말 새신자 등록을 하고 평강제일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그는 1932년 경북 김천 생으로 1951년 소위로 임관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69년에는 수송대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보국훈장, 화랑무공훈장 등 세 개의 훈장을 수훈했다.
교회에 대한 첫 인상이 ‘질서’에 관한 것이었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군인이라고 모든 걸 다 ‘질서’로 바라보지는 않으니까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성도들의 행동과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예배의 준비와 과정, 마침 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절도 있는 군인들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을 지휘하는 분은 대단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갖고 계신 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휘선 박윤식 목사님은 역시나 그런 분이셨습니다.
‘리더십’은 무엇인가요?
한마디 한마디 힘을 갖는 것이지요. 그 힘은 강제하는 힘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리더십은 올바른 리더에게서만 나오는데, 군도 사회도 리더가 올바르지 않으면 와해됩니다.
박 목사님은 어떤 스타일의 지휘관이고 리더인가요?
본인의 행동이 똑바르시죠. 제가 보기에 가장 똑바른 분입니다. 기본적으로 통솔력의 힘은 정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행동으로 보이시는 분이죠. 지시해도 될 일을 굳이 현장에서 직접 함께 하시잖아요. 말하자면 동고동락형이고, 솔선수범형이랄까요. 이런 모든 것들이 성도들을 기꺼이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스타일의 지휘관은 지금껏 만나본 적도 없고, 그런 지휘관은 세상에 없습니다. 박 목사님이 참모총장, 대통령을 하셨으면 우리나라, 우리 군이 크게 발전했을 겁니다.
그는 평소에도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2014년 출간한 자서전에도 “이러한 애국심과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분이 군의 고위 지휘관이었다면 강군을 육성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리라 믿어진다”고 적었다. 이옥경 전도사가 한번은 몸이 아파 새벽 경건예배를 거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이규설 성도는 “상관이 나와있는데 왜 안나가느냐?”고 딸을 다그쳤다고 한다. 그는 “지휘관이 있는 곳이라면 그 하속(下屬)은 무슨 수라도 그곳에 있어야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저는 박윤식 목사님 아니었으면 교회라는 곳에 나오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기성 종교와 종교인에 대해 불신이 많았다고 했다. “거짓되기는 다 마찬가지”라고 느꼈고,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면 되지 않나 생각했다고 한다.
어떤 점에서 그랬나요?
우선 말씀을 들어보니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간 저를 전도하려던 많은 친구, 동료, 지인들이 평강제일교회를 오해하고 만류하기도 했는데, 들어보니 설교 말씀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누구보다 언행이 가장 정직하고 똑바른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사상 문제로도 철저하게 반공적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온 가족이 다녀도 되겠다’고 생각했죠.
교회에 나오는데, 반공도 그렇게 중요합니까?
공산주의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전쟁을 겪어본 세대입니다. 우리 세대는 그들의 악행을 다 지켜봤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겪고 공산주의를 막아냈기 때문에 오늘의 번영이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정말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6·25 전쟁이 한창인 1950년 12월 육군종합학교에 입대, 이듬해 2월 육군 소위(병참 병과)로 임관했다. 당시는 9주 만에 장교를 대량 양산할 때였고, 임관 10일 만에 동기 중 전사자가 생겨났고 임관 첫해에만 26명이 전사하는 등 이른바 ‘소모품 소위’ 세대였다.
후손들이 그것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후손에게 전해야 합니다. 박 목사님은 이런 일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시고 헌신하셨죠.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다”고 하신 것,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평강제일교회 연수원은 세워진 곳마다 6·25 격전지로,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것만으로도 후대에 큰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주문진, 오색, 여주, 하동, 구례, 청평 등은 엄청난 전투와 공비 토벌로 큰 희생을 겪었던 곳들입니다.
그는 6·25 전쟁 기간 연수원이 위치한 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작전에 참여했다. 오색연수원 주변 일대서 벌어진 1951년 봄 ‘현리 전투’로 국군 3군단이 궤멸당하다시피 했을 때는 그의 부대 역시 중공군에 포위됐지만 극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자신의 지휘 책임 하에 있는 인력과 20여 대의 차량을 전부 무사히 후방으로 빼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네 끼를 굶다가 부하들이 미군이 먹다 버린 깡통을 주어왔을 때 차마 장교 체면에 그것을 받아먹을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울먹이기도 했다. 그는 이 철수 작전 성공으로 그해 11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말단 장교인 소위가 훈장을 받는 일은 희귀한 일로, 그 훈장은 동기 중 첫 번째였다.
6·25 전쟁 발발 때 이규설 성도는 고향 경북 김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 달쯤 뒤인 1950년 7월 말쯤 상주와 영동을 우회한 인민군이 갑작스럽게 김천시를 포위했다. 소개령(疏開令)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에는 한 순간에 인민군이 들어와 진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출근 후 ‘실종’ 상태가 되고 장남인 형은 바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아버지가 총살당했다는 소문에 시체 더미를 뒤지기도 했으나 찾지 못했다. 마을을 장악한 인민군들은 매일 청년들을 집합시켜 인민의용군에 내보내는 데 혈안이었다.
청년 이규설은 자원 출병을 강요당했으나, 나이 어린 동생 다섯에 집안을 책임져야 해 도저히 자원해 손을 들 수 없었다. 당시 면(面) 총책임자였던 ‘김일성 대학 4년생 안(安) 동무’가 강당에 청소년들을 불러다 조국 해방을 위해 의용군에 지원하라며 손을 들라 했는데, 혼자만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 자를 당장 제1선으로 보내라”고 소리 지르고 나가버렸다. 다행히 당일 현장에서 고향 선배인 ‘부역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이로 인해 더욱 미움을 샀다. 압박이 심해지자, 바로 아래 동생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던 형을 대신해 인민의용군에 자원했다. 만16세로 연령이 미달돼 동원 대상이 안 됐는데도 그들은 동생을 데려갔다. 집안 전체를 위한 동생의 큰 희생이었다. 이규설은 그 후 낮에는 뒷산에 숨어있다가 밤에 내려와 동생들을 보살피는 생활을 이어갔다.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보급선이 끊기자 얼마 안 가 철수하기 시작했어요. 만약 서울 수복이 늦었다면 전국적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을 거예요
인천상륙작전 후 그의 가정은 서서히 회복된다. 실종된 아버지는 포위된 당일 인민군에 붙잡혔으나, 동네 사람들의 적극적인 ‘변호’로 죽음을 면한 뒤 피란했다 생환했고, 인민의용군에 끌려간 형은 아군 포로로 잡힌 뒤 마산수용소에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조치로 귀환했다. 그를 대신해 자원했던 동생도 유엔군의 반격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탈출했다. 동생은 기회가 왔을 때 인민군복을 벗어던지고 탈출하려는 계획을 짜고 처음부터 군복 안에 체육복을 입고 떠났는데, 정말 그렇게 결행했다. 주변에 많은 집안 가운데 이런 해피엔딩을 맞은 집안은 거의 없었다. 동네 많은 청년들이 인민군에 강제 동원됐지만 귀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받은 것”이라 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친이 귀가하신 뒤 얼마 안 있어 그는 군 입대를 결심한다. 고향을 떠나는 날 그는 “국어사전, 영어사전을 싸들고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고 자서전에 썼다. 생사를 오가는 전쟁통, 거의 망하다시피 한 가난한 나라의 군에 지원하러 떠나면서도 ‘꿈’을 보따리에 함께 쌌던 19세 청년의 심경은 어떠했을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처연하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개인사로만 보아도 왜정(倭政) 시대에는 초등학생으로 산에서 솔방울을 따다 모아 학교에 내고, 신작로에 자갈을 깔았습니다. 6·25 때는 전쟁을 겪었고, 월남전에도 파병됐습니다. 월남 파병, 파독 간호사·광부들의 희생은 경제발전의 분명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월남전 파병으로 미국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원하는 많은 것들을 들어주었습니다. ‘옛날’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들만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애썼던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몇 해 전 굳이 자서전을 쓴 것은 조카와 손자들에게 오늘날의 행복이 어디서 왔는지 옛 일들을 알려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의 자서전 「내가 살아온 팔십 평생, 靑江 李揆偰(청강 이규설)」은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건조하고 담담하게 지난 일을 서술하고 있지만, 나라가 겪는 어려움이 어떻게 개인의 생사, 가정·집안의 존립을 좌지우지하고 위험으로 내모는지 충분하게 얘기해주고 있다. 그것들을 회고하는 내내 그는 눈시울이 붉었고, 눈가가 떨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혼돈의 현대사의 파고를 헤쳐나온 끝에 그는 ‘낙원(樂園)’에 안착했음을 찬송했다.
“예배를 위해 교회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6만여 평의 넓은 공간에 울창한 숲과 깨끗한 환경에 매료되어 교회에 드나드는 것이 즐겁고, 박윤식 원로목사의 구수한 말씀에 매료되어 황혼기에 있어 유일한 안식처요 마음 속의 낙원이 되었다”(자서전 152쪽)
참평안 휘선특별호 제3권_ 제3부 | 구속사(救贖史)와 세속사(世俗史)가 하나로 만나 p.115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