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참사랑
아버지의 참사랑
창세기 49:1-2, 누가복음 15:11-32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사랑하는 열두 아들에 대해 똑같이 축복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받은 그릇, 하나님께 대한 신앙 상태에 의해서 복을 나눠준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 다른 본문인 누가복음 15:11-24은 나간 탕자가 돌아오는 장면이죠. 그래서 ‘아버지의 참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모세 율법에는 장자(長子)에게는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 둘째 아들에게는 3분의 1을 기업(基業)으로 주도록 엄격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신 21:16-17).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들이 따따부따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상속법은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해서 반드시 실행해야 합니다.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물려주는 경우는 아버지가 현역에서 은퇴할 때, 또는 아버지가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와서 예측불허지만 많은 사람, 즉 가족과 의사(醫師)들이 ‘아무래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면 아버지의 자발적인 의사(意思)에 의해 가족들 다 모인 데서 그 몫을 나눠줍니다. 아버지가 지극히 아들을 사랑하는 표시이죠.
오늘 분문에는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도, 그것도 상속에서 두 번째에 불과한 둘째 아들이 ‘나한테 돌아올 유산의 몫을 달라.’고 아주 간청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귀찮을 정도로 아버지한테 졸라댑니다. 성경 말씀 볼 때 크나큰 불효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아버지의 다스림을 거부한 죄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유와 독립을 얻고자 하는 일종의 방종(放縱)이죠.
그러나 이 비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재산을 요구하는 탕자(蕩子)가 아닙니다. 밖으로 나간 탕자보다 실은 더 지독한 사람인, 집 안에 있는 불평, 불만하는 탕자, 즉 장남도 아닙니다.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마음 깊게 두고 계신 관심사는 아버지의 고충과 기다림, 인내입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외면치 않고 기쁘게 품어 주면서 눈물겹게 입맞춤하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신을 신기고, 새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해서 잔치를 베푸는 광경을 볼 때 아버지의 참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저는 감동적인 큰 은혜를 먼저 받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려는 교훈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 인생은 하나님을 떠난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만 기도하지 않고, 성경 보지 않고, 찬송하지 않고, 간절히 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신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 이 모두가 집 나간 탕자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불사하며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하는 광경을 보세요. “아버지의 재산, 내 몫을 주쇼.” 할 때 “너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안 돼.” 하며 우리가 생활에서 많이 경험한 그런 말을 아버지가 했겠죠. 큰 소리가 오가는 장면이 눈에 선하잖아요? 결국 탕자는 그렇게 아버지의 재산을 받은 직후, 그토록 바라던 이상향(理想鄕), 유토피아인 먼 나라로 떠났다고 본문에 기록돼 있죠(눅 15:13上). 둘째 아들에게 그 먼 나라는 단순히 거리상의 먼 나라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것, 즉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완전한 분가(分家) 상태를 말하죠. 떨어져 나가는 떨거지와 같은 인간입니다. 또 의식(意識)상의 먼 나라입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이나 형님의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떨어진 지역을 ‘먼 나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탕자에게 먼 나라는 그야말로 자유가 보장된 이상향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먼 나라를 향해서 나갔던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간섭을 심히 불쾌하고 귀찮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방종한 인간의 그릇된 실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 인간들은, 참 자유를 갖고, 자유를 알고, 자유를 깨닫고,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떠나서는 천상천하 어디에 가도 자유가 없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올바른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는 가시와 엉겅퀴밖에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툭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 말씀은 이렇단다.” 하니 매사에 귀찮은 것입니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원수같이 보입니다. 하도 ‘하나님’, ‘하나님’ 찾는 바람에 말이죠. 이 땅 위에 그런 인간들 많잖아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믿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 두지 않고 사는 사람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간섭을 불쾌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떠난 그릇된 실존 세계를 보세요. 그러나 고린도후서 3:17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1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진리, 말씀이 계신 곳은 언제나 편안하고 자유합니다. 로마서 8:6에 육(肉)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죠. 인민군 토치카(전투 진지)보다 더 캄캄합니다. 해골이 있는 곳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떠난 적이 많죠.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님 앞에 가장 불효자식이 되는 순간입니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을 순간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먼 나라에 가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죠. 부모님은 자식이 집에 있든지 먼 나라 갔든지 항상 노심초사하며 자식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미역국이나 끓여 먹었나?’, ‘떡국이나 끓여 먹었나?’, ‘제대로 밥은 먹고 사나?’ 하고 늘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뜨거운 사랑이죠.
성경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은혜받는 자리를 멀리하는 사람은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시편 146:5에 정확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에 이른 둘째 아들의 삶은 그야말로 급전직하(急轉直下)였습니다. 일의 형편이나 상황이 갑작스럽게 바뀌어 걷잡을 수 없는 어둠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급전직하라고 합니다. 한심하죠. 아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15:13 말씀 볼 때, 허랑방탕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는 소유한 재산뿐만 아니라 인생까지도 순식간에 파괴됐습니다. 완전히 망가졌어요.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생애는 가치가 없습니다. 참 목표가 없어요. 죄밖에 없습니다. 부정으로 낭비하는 시간이죠. 그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냅니다. 낭비하는 거예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 즉 시간과 재산과 재능과 기회, 이 네 가지가 몽땅 사라졌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송장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둘째 아들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있죠.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뜻입니다. 난처한 일만 일어납니다. 걷잡을 수 없는 어둠의 세계가 개인과 가정과 사업에 닥칩니다. 그가 그토록 흠모하고, 이상향인 줄 알고 찾아간 유토피아가 과연 그렇게 됐습니까?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눅 15:14). 짐승은 고사하고 사람 먹을 것조차도 없을 정도로 큰 흉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껏 아버지 품안에서, 아니면 돈의 위력으로 호의호식하던 둘째 아들 탕자는 참으로 뼈저리게 배고프고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실로 하나님을 떠나버린 인간에게 불행과 고통이 겹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극 중 가장 큰 비극은 배고픔, 고통, 아픔, 쓰라림이 아닙니다. 그 고통 중에서 ‘왜 자신이 현실에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를 깨달아야 하겠죠. ‘하나님을 떠나왔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쓰라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그걸 뒤늦게 깨달았죠. 그는 뼈저린 배고픔과 고통을 해결해 보려고 자구(自救)의 노력도 했을 겁니다. 돈 있을 때 친구니 형이니 하던 사람들을 찾아가 어려운 사정을 얘기할 때, 다 외면했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방 사람한테 가서 사정해 머슴으로 고용됐습니다. 그것도 돼지 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기죠. 돼지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습니다(레 11:7-8). 예수님도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탕자는 돼지를 치면서 돼지 틈에서 자야 했습니다.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를 먹는 형편이 됐습니다. 그것도 흉년이 들었으니 조금밖에 주지 않았죠. 그거라도 얻어먹으려 했더니 주인의 박절한 금지령! “돼지 먹는 쥐엄 열매, 너 손대지 마!” 그러니 배고픔은 말할 수 없죠. 성경 말씀 볼 때 “내가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될지언정, 주는 자가 없도다.” 했습니다. 참 기가 막힌 말씀이죠.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있지 않습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시작할 때 기도로 시작했습니까?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겼습니까? ‘시작도, 진행도 하나님이 하신다, 결과까지도 하나님이 마치셨다.’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니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찬송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 속에서 감사를 잊어버리면 짐승만 못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하셨죠. 하나님을 떠난 내가 아니었습니까.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생활은 동떨어져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고집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하다가 점점 죄악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삶의 자리가 참된 자리가 돼야 할 텐데 창세기 3장 말씀대로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죠? 밀을 심었는데 가시를 거둡니다. 잡초만 무성합니다. 수고와 씨가 낭비된 거예요(렘 12:13). 밀을 심었는데 왜 가시를 거둡니까? 밀의 낱알을 거둬야죠. 돈 번다고 집을 잡혀 대출받고, 처가에서, 친구 집에서, 시누이, 올케한테 돈을 꿉니다. 시작은 거창하죠. 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볼 때 “네가 하나님께 돌아오너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걸 깨달아야 해요. 늪으로 빠져들면서 절망적인 자리까지 떨어지게 됐는데, 그때마다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 하는 일마다 안 되게 하고, 마음 상하게 하고, 가정도 쑥대밭이 됐는데도 네가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암 4:6-12)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네 번 시험하셨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마음이 강퍅해지고, 생각 자체가 사단의 생각이 됩니다. 돼지와 같이 부정(不淨)한 삶을 살면서 죽음으로, 죽음으로 행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입니다.
인생은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킬 때 소망이 있습니다(눅 15:17-20).
우리는 절망으로 치닫던 탕자에게서 삶의 전환점의 한때를 목격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상실하고, 아주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있습니까? 옷도 겨우 입은 옷밖에 없어요. 괴나리봇짐도 없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실패한 궁핍의 현장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을 보세요. ‘내 아버지 집은 먹을 것이 많은데.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겠구나.’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제 고향인 황해도 해주 사리원 북리에 ‘하수잔’이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유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해서 크게 부자가 됐습니다. 남편이 세상 떠나고 아들 하나 있는데 돈 주고 들어간 대학에서도 공부를 안 하는 거예요. 졸업하고도 놀고먹기만 좋아했습니다. 제가 몇 번 만나 교회 얘기를 해도 듣지도 않아요. 그러다가 어머니가 사놓은 7층짜리 빌딩을 저당 잡혀 장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렸지만 듣습니까? 대들고 말이죠.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얼마 후 가보니 어머니가 빌딩을 팔아서 아들에게 줬어요. 그리고 1년도 못 가서 아들이 다 털어먹었습니다. 할머니한테 “빌딩을 왜 줬습니까?” 물었더니 “그렇게 줘서 자식을 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제가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이 “친자식이지만 나를 어머니로 알지 않고 ‘부자 과부 할머니’, ‘빌딩 가진 할머니’로 알더니, 완전히 망한 다음에야 어머니가 남의 집에 식모 노릇 하며 어렵게 살 때 비로소 ‘아아, 나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는구나!’ 하고 깨닫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연을 눈물겹게 저에게 얘기하는 거예요. “빌딩 가지고 있으면 어미와 자식이 원수가 됩니다. 그놈은 돈밖에 몰라요.” 그래서 망할 줄 알면서도 빌딩을 줬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제가 많이 깨달았습니다. 망할 줄 알면서 왜 줬습니까? 내 자식을 찾기 위해서! 한 푼 없고 의지할 데 없으면 참 어머니인 줄 자식이 알 것 아닙니까? ‘나 때문에 어머니가 이렇게 고생하는구나.’
“그래서 지금은 속마음이 편안합니다. 자식이 돌아왔으니까!”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제가 하수잔 할머니를 아주 위대하게 봤습니다. 재산 다 잃어버려도 자식 하나 찾기 위해 집 한 칸 없고 남의 하꼬방(판잣집)에 사는 그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그때 많이 배웠어요. “내가 돈 가지고 있으면요, 자식 없습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들이 비로소 돌아와서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울고, 몇 번 쌀을 사와서는 어머니의 밥을 해준다고 하더랍니다. “참 내 아들을 찾았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탕자는 이런 번민과 후회, 성찰의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죽일 놈이구나.’ 스스로 돌이켰어요.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자기를 찾았습니다. 회개하면서 아버지한테 갈 때 그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겠죠. ‘나를 내치지나 않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갈 수밖에 더 있습니까? 비참한 상황에서 아버지 집만 바라보고, 아버지만 바라보고, 아버지의 부유한 것을 바라보고 가는 그 무거운 발걸음! ‘쫓겨나지나 않을까? 받아줄까?’
둘째 아들이 당한 궁핍과 철저한 생의 실패에는 그의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오묘한 간섭이 있었다는 것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거친 풍랑과 세찬 바람을 통해, 생을 허비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깨우쳐 줍니다. 이렇게 위대한 자기 발견을 한 뒤 지난 생을 돌이켜볼 때 후회가 막심합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잘못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았습니다. ‘시간 낭비도 했지만, 내가 사람이 아니었구나.’ 탕자는 이제 고집도 다 버렸습니다. 체면도, 미련도 다 버렸습니다.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한테 큰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자신이 이상향으로 알았던 그 먼 나라, 그것은 죄악의 나라죠. 죄악의 친구, 죄악의 거리, 죄악의 기생을 만나 재산을 다 탕진한 것 아닙니까? 영원하고 풍요한 만족이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누가복음 15:18-20 말씀 볼 때 눈물이 저절로 납니다. 이처럼 참된 회개는 과거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결연한 행동입니다. 아버지 앞으로 갔습니다. 악행들을 숨길 새 없이 조목조목 아버지 앞에 말하는 것 보세요(눅 15:18-20). 참된 회개는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허물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밝히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과 축복과 은혜로써 감싸 주면서 이미 용서가 지나고 있습니다. ‘용서해 줄게’가 아닙니다. 이미 용서해줬어요. 탕자는 자기 부족한 것을 깨달았죠. 겸손한 마음으로 통회(痛悔)했습니다. 자복(自服)했습니다. “나는 하늘 아버지와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머슴의 하나로서 날 써 주십시오.”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아버지가 ‘야! 이 자식이 정말 고생 많이 했구나. 정말 뉘우치는구나.’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했겠죠. 잃었던 자식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가 자신의 죄악을 아뢰는 광경을 보세요.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 품안에 안겨 있을 때 행복합니다. 예배와 집회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 은혜받는 것,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이후로 그 나라 갈 때까지 제일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아버지, 어머니 품안에 있어야죠. 자식이 아버지, 어머니 말씀을 듣는 순간 얼마나 편안합니까? 얼마나 행복합니까? 너무 편안하고 너무 행복해서 그걸 몰라요. 다 크면 자기가 잘 나서 큰 줄 압니다. 하나님은 지난 죄를 뉘우치며 당신에게 돌아오는 영혼들을 물리치지 않고 관용하겠다고 하십니다(시 34:8, 시 51:17). 얼마나 좋습니까? 컴컴했던 영혼이 벌써 밝아지는 거예요.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먼 나라에서 경쾌하게 아버지 집을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발을 옮기는 탕자의 모습 보세요.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가 과연 나를 반겨 주실까? 불효의 자식인 나를 매질이나 하지 않을까?’ 근심은 하겠죠. 하지만 둘째 아들의 염려는 공연한 기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매일 노심초사해가면서 아버지는 창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서, 먼 둑 밑을, 강가를, 개울 아래를 봅니다. ‘누가 오지 않나?’ 하루도 늦춘 적이 없어요. 마침내 거지 중에 상거지 같은 한 사람이 옵니다. 보니까 자기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뛰어가서 안는 모습을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우리는 한 걸음이지만 하나님의 걸음은 천 걸음입니다. 천 발짝! 우리는 한 발짝, 한 발짝 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천 발짝 걸음으로 휙 날아와서 우리를 안아 주는 그 모습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봐야 100년 못 삽니다. 다 갈 사람들입니다. 준비하셔야죠. 측은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울음을 터뜨리며 아들을 껴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목욕도 못 해 화장실 악취보다 더한 냄새가 나지만, 남이 아니라 친아들입니다. 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가락지를 빼서 끼워 주고, 새 신을 신겨 주고, 새 옷을 입히고, 살진 소를 잡아서 동네에 다 풍악을 울려가면서 잔치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잖아요?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이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아들을 발견한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 못 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아버지가 매일매일, 순간순간 나간 자식을 잊지 않고 늘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 비록 아들은 아버지를 박차고 떠나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가슴 뜨겁게 집 나간 탕자 자식을 안고 있습니다.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아버지 마음속, 어머니 마음속을 자식들이 누가 압니까? 겉으로는 야단치지만, 실은 아들딸을 어머니 마음속에 품고 야단치는 것 아닙니까?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 나간 아들을 늘 눈물겹게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그 부모의 모습들을 생각해 보세요. 참 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깊이 벌써 아들이 머무르고 있어요. 순간 아버지는 마음속에 있는 아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에요. 육신의 아버지가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아버지, 저의 아버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더욱 측량할 수 없죠.
우리는 무거운 걸음으로 한 발짝 옮겼지만 아버지는 천 발짝을 단숨에 달려드는 것을 보세요. 사랑하고 환영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서 발견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합시다. 말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내가 결혼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자식 낳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내가 사업하는 것도, 돈 버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보세요. 절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많은 죄를 당신 말씀 한마디로 깨끗하게, 샤워장에 가서 목욕하듯이 씻어주시는 그 광경! ‘딸아 안심하라, 내 말로 네 죄 사했다.’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좋습니까?
둘째 아들은 더 이상 자식으로서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로서 그대로 인정해주는 광경 보세요. 말할 때 아버지는 묻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자체로서 만족합니다. 기쁩니다. 잊어버렸다가 찾은 거예요. 죽었던 자식이 다시 살아온 것과 똑같습니다. 성경에도 말씀하고 있잖아요? ‘죽었다가 살아났다’. ‘잃어버렸다가 찾았다.’는 말입니다. 아들의 누더기가 죄악 된 옛 과거를 말하고 있죠. 그것을 벗기고 최고의 옷을 입혔습니다. 다시 아들의 명분을 준 것입니다. 최고로 재임명해 준 것입니다.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아들의 권위를 다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자유인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종은 신발을 신지 못했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누구의 지배를 받습니까? 주인의 아들입니다. 신분이 바뀌었어요. 마음대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거죠, 욕심과 죄악에 이끌려 자행자지하던 일종의 방종과 교만을 다 청산하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살게 되는 나 같은 탕자! 바로 우리한테 권면하시는 말씀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맺겠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있습니까? 호세아 6:1에 있죠. “돌아오너라. 나의 품으로 돌아오너라.” 호세아 14:1에도 “돌아오너라.” 호세아 12:6에도 “돌아오너라.” 하십니다. 교회 나오기 싫잖아요? 무서운 죄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평안과, 진정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살아 계시는 이 말씀을 떠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의 도움입니다(시 146:5). 사람은 도움 없으면 못삽니다. 하나님이 나의 도움입니다. 나의 소망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전부가 되시는 하나님. 이 말씀을 떠나지 마세요. 아무리 속상해도 말씀 읽을 때 하나님이 가만두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자를 통해, 성령을 통해 크신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맙시다. 맡은바 직분에 정성을 다하고 충성하세요. 교구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와야 합니다. 어제 제가 몸이 많이 아팠지만, 교역자한테 말씀드렸어요. “오늘날까지 나오던 분이 새 식구보다 낫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역장, 교구장이 찾아가고, ‘가봐야 소용없다.’ 하지 말고 목사님이 찾아가서 눈물겹게 기도해주고 권면할 때 새 식구 100명 들어오는 것보다 옛 식구 하나 들어오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정신 차려서 탕자가 돌아오는 산 역사,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교회에서 큰 잔치를 베푸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마세요. 거만과 교만 붙잡고 살지도 마세요. 다 내동댕이치세요. 이 세상 나가야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세상 나가지 마세요.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스스로 돌이켜 죄악의 자리에서 당신의 품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는 그 순간! 행복의 문이, 축복의 문이, 소원의 문이, 형통의 문이 활짝 열릴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두신 풍성한 은혜, 그 축복! 하늘 문을 열고 쏟아져 보세요. 집의 그릇마다 꽉꽉 찹니다. 나는 그렇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주시는 그 놀라운 축복을 보세요. 세상 사람 같으면 ‘왜 살아서 돌아와? 너 망할 줄 알았어, 나가 죽어. 내가 너 낳은 것이 내 죄다. 너 낳고 젖 먹인 것이 너무 아까워. 너는 내 새끼 아니야, 호적에서 파 가!’ 우리 생활 주변에서 듣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는 그랬습니까? 탕자가 무거운 한 발짝을 갈 때, 아버지는 천 걸음을 빠른 걸음으로 와서 껴안고, 그 냄새 나는 입에 입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껴안고 우는 모습 보세요. 가락지를 끼워주며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언약의 징표입니다.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비실비실해서 시장에서 팔아먹을 것이 아닌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에서 잔치하고, “내 아들 잃어버렸다가 찾았습니다. 내 아들 죽었다가 살았습니다!”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오늘날까지 평강제일교회에 나왔다가 시험 들어서 안 나온 분들, 다 탕자의 아버지 심정으로 찾아가세요. 하나의 영혼도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 찾아와서 우리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 찬송, 영광을 돌리고, 그 나라 가서 세세 무궁토록 근심이 없고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이 땅에서 예수 믿는 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산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2003년 11월 2일 주일 2부예배
휘선(暉宣) 박윤식 목사 설교
- 23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