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겸손과 봉사의 축복
아브라함의 겸손과
봉사의 축복
창세기 18:1-10, 누가복음 18:9-14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겸손’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말씀의 이면에 아브라함의 겸손이 숨어있습니다. 순종의 결과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의입니다. 의의 결과는 충성입니다. 충성의 마지막 결과가 겸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영원히 잊지 마세요. 창세기 15:5-6 말씀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한테 후손에 대해 약속하면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를 보여주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이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롬 4:3). 느헤미야 9:7에도 ‘아브라함의 마음이 충성됨을 보시고 의로 여겼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므로 생긴다고 했습니다(롬 10:17). 그 의가 충성이죠. 충성이 없는 자는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유하다고 했습니다(마 11:28-29). 겸손하다는 말씀입니다. 옻나무 만지면 옻이 몸에 옮기듯이 우리도 예수를 닮아야죠. 말씀하는 사람이나 말씀 듣는 사람에게 진정한 겸손이 없으면, 순종도 없습니다. 겸손 없이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먹고 살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분에게 무슨 의가 있겠습니까? 의가 없으니 충성도 없죠. 충성은 거짓 없이 정성과 마음을 전폭적으로 다 바치는 것입니다. 바치지 못하면서 이익이나 얻으려고 할 때는 자기 자신이 벌써 불구덩이, 지옥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찍이 잠언서 기자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잠 18:12, 16:18). 겸손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준다고 하셨습니다(약 4:6). 겸손하면 영안(靈眼)이 열려서 기회를 포착하고 놓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여호와께서 세 사람으로 나타나셨을 때 알아보는 것을 보세요. 90살이 넘은 아브라함이 땅에 엎드려, 그 젊은 분들한테 경배했습니다(잠 29:23, 시 147:6, 시 10:17, 잠 22:4).
교만은 모든 죄악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면 만악(萬惡)이 귀신, 도깨비를 다 마음 가운데 몰고 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겸손은 만덕(萬德)의 근본입니다. 겸손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교만이 손상시킨 덕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는 어디 가든지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뭡니까? ‘천천의 수양(rams)이나 만만의 강수(rivers of olive oil)보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미 6:7-8).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겸손한 자와 함께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사 57:15). 겸손한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가져올 마지막 감추어 있던 비밀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기다리라 했습니다(벧전 1:13, 5:5).
숯은 바싹 구워져야 좋죠, 덜 구워진 숯(냉과리)은 연기가 나고 냄새만 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눅 12:49). 성령의 불로 몽땅 과거지사를 태우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 믿으면서 온전히 타지 못합니까? 그것이 냉과리 인생입니다(시 102:3). 사도 바울도 원래 교만한 자였습니다. 난 지 8일 만에 할례받고,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왕족입니다. 다소 대학을 나와서 학벌이나 족보 봐도 빠질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는 죄가 없고, 예수 믿는 사람만이 죄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앞장서서 죽였던 겁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바울을 보세요. 수많은 교인을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며 눈물 흘리면서 고백합니다(딤전 1:15).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중에도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엡 3:8, 고전 15:8). 사도 바울도 예수의 겸손을 배운 것입니다(행 20:19). 기독교의 성자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첫째가는 덕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겸손하여지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면 기도 안 하는 것, 전도 안 하는 것, 감사, 십일조, 교회 생활에 충성 안 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몇십 년 신앙 생활했으면서도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 돼서 결정하고, 스스로 위로받는 자,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믿고, 행함으로 옮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깜짝 놀랐습니다(창 22:15). 직분 받은 분들은 하나님 앞에 한 치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세리(稅吏)는 성전에 들어오기도 겁낼 정도로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 진정 겸손합니까? 복 받는 믿음을 가지려면, 복 받는 행함이 있어야죠. 복 받는 행함!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망과 음부도 교만도 마지막에는 한꺼번에, 불구덩이에 던짐을 당합니다(계 20:12-14). 그러나 그 전까지 교만은 그림자같이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육신은 병들고 쇠약해져도, 교만은 늙을수록 더 기고만장합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진급될수록, 학식을 터득할수록 교만도 따라서 더해집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이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다가 7년 동안 짐승 같은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위로 하늘을 쳐다보고, 위대하고 겸손한 왕이 되었습니다(단 4:34). 하나님을 곧바로 쳐다보는 자에게는 교만의 그림자가 순간 없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쳐다볼 수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모두 세상의 것, 땅의 것입니다(요일 2:15-17). 사울 왕도 솔로몬 왕도 다윗도, 잘 믿다가 하나님을 앙망(仰望)하지 않고 땅의 것만 바라보고 교만했을 때 그 나라, 개인이 얼마나 비참한 일을 당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해야 믿음이 생기고, 의로 인 침 받습니다. 충성이 있어야 더 겸손해집니다.
둘째,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바로 알았습니다. 겸손해질수록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로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참모습을 몰랐습니다. 그 속에 거짓이 꽉 차 있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돈 벌고 밥 먹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자기의 참모습을 알았어요.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한 것처럼, 스스로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죄인인 줄 알았고, 하나님의 긍휼히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현재의 생활을 통곡할 줄 알며,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믿음들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근본은 부모의 정(精)과 피[血]로 된 썩은 육체입니다. 마지막에는 한주먹의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재물이 따라갑니까? 내 부모가 따라갑니까? 사랑하는 아내, 내가 귀엽게 여기는 아들딸이 따라갑니까? 그동안 배운 것이 다 따라갑니까? 안 따라갑니다. 성도 여러분,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 권세가 이 땅에 나는 꽃 하나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힘이 세다고 한들 맹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도 별의 수효를 우리는 셀 수 없습니다. 인생은 무(無)에서 와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시는 날 갑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죄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사랑, 용서가 절대로 필요한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같이 교만하지 않고, 세리같이 겸손해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겸손은 높은 자 앞에 자기를 머리 숙여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발싸개 같은 아주 못난 사람들, 그 앞에 머리 숙일 줄 아는 분이 겸손한 자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십니다. 겸손한 세리는 응답을 받았고,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눅 18:10-14).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바로 알고, 죄인임을 자각하는 태도가 갖고 싶다면 겸손하세요. 겸손이 다 알려 주십니다. 어디까지 낮아져야 겸손입니까? 구두 위, 끈 매는 데까지 내려가서 “하나님 됐죠?”하고 물으면, “네가 보기에는 됐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됐다, 더 낮아져라!” 하시면서 신발 밑창, 먼지 있는 데까지 내려가게 하시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아브라함은 멸망할 소돔과 고모라에 거하고 있는 조카 롯을 위해 땅바닥에 얼굴을 비비면서 사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실존의 모습을 발견한 자는 참으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괴로움을 당해도 70-80년, 길어야 100년밖에 더 받겠습니까? 말씀 듣는 평강제일교회의 성도 여러분들이나 저나, 신발 밑창까지 내려가서 누가 짓밟고 얼굴에 먼지를 묻혀도 그저 감사할 줄 아는 겸손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2004년 3월 4일 목요구국(救國)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 23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