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선물을 받자
오늘이라는 선물을 받자
누가복음 23:39-43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의 세무서장 삭개오에게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입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지,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이라 말씀할 때 그 오늘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히 3:7, 15, 4:7). 마지막 때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이라는 선물을 받자’입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23:39-43의 마지막 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먼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종교 지도자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욕했고,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도 같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마 27:44, 막 15:32).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강도 중 하나가 회개하고 자기 영혼을 주님께 맡기며 “주의 나라가 임할 때 나 같은 것도 생각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강도들보다 더 극악한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병정들에게 채찍으로 많이 맞아 등에 고랑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가래침을 뱉고, 주먹다짐하고, 수염을 잡아 뽑았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살인,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혀 온 강도들이 좌우편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재수 없게 잡혔다. 이렇게 젊어서 죽으니 억울하다.’ 별말을 다했겠죠. 그런데 옆에서 들어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 마당에도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 죄를 사해 주십시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원망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인류의 죄를 걸머지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그 모습! 그 장면을 보면서 우편 강도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회개의 영이 그에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우편 강도가 좌편 강도에게 하는 말을 보십시오. “너와 나는 동일한 죄를 짓고도 아직 깨닫지 못하느냐? 이 가운데 계신 분이 옳지 못한 것이 뭐가 있느냐? 다 옳지 않으냐?” 예수님을 대신해서 그가 변론해 준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입니다. 지옥에 갔다가 다시 나왔다가 또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온 정성을 들여서 자기 영혼을 주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글로, 설교로 들은 천국과 지옥이 아닌, 체험적인 천국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소망을 갖지 못한 신앙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세상을 보면 세상에 붙게 돼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계셨습니다. 강도들은 좌우편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보이는 표면적 세계에서는 다 똑같은 십자가죠. 그러나 가운데 십자가는 죄 없으신 분입니다. 인류의 대속(代贖)의 주로서 죄를 사해 주시는 십자가, 이 땅에 우리를 섬기러 오셔서 목숨까지 버리신 십자가입니다(마 20:28). 우편의 십자가는 회개의 십자가입니다. 좌편의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의 십자가입니다. 처음에는 좌우의 십자가가 마음이 일치했습니다. 두 강도가 함께 예수를 향해서 욕했습니다. 외경(外經)에는 이 강도들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우편 강도는 디스마스(Δυσμας), 좌편 강도는 게스타스(Γεστας)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들이 형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는 ‘너와 나는 피를 나눈 형제다. 평생 마음을 같이 하자.’ 했을지언정, 십자가 위에서는 달라집니다. 나눠집니다. 그래서 분리의 십자가, 회개의 십자가입니다. 회개하는 강도는 주님이 외면하시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한 자는 멸망과 저주의 십자가, 지옥의 십자가입니다. 회개한 우편의 십자가는 천국의 십자가입니다. 좌편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멉니다, 뜻으로 볼 때 하늘과 땅 차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하는 부자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 “너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덩이가 있다. 거리가 멀어 갈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눅 16:26). 이제부터 성도라면 십자가를 볼 때 ‘아아, 거리가 멀구나! 합한 게 아니라 나누어진 십자가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평신도든,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 생애가 우편에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뱀처럼 땅에 딱 붙어 세상밖에 모르는 생활은 아닌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 나라, 먼저 말씀, 먼저 교회입니다.
인류 역사상 주님을 위해서 변호사 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신구약에 우편의 강도뿐입니다. 좌편 강도에게 “야, 그러지 마라. 너와 나는 당연히 죄 때문에 벌을 받지만 가운데 계신 분이 옳지 못한 일이 어디 있느냐?”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나라가 임할 때 하나의 영혼도 외면치 말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그의 회개를 보시고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참 귀한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까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영혼을 수확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영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 뜻이 아니었습니다(마 18:14). 그러니 십자가에서 아무리 고통스러우셔도, 회개하는 한 영혼을 귀찮아하고 외면하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실 때 깊은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하나의 영혼을 놓칠까 봐 아버지 앞으로 데려가기 위해 사랑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죄 가운데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 그래도 순종한 우편 강도를 고맙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강도질하다가 붙잡혀 간 강도를 동정할 사람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놈이야 죽든지 말든지’ 하는 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시면서, 놓치지 않고 영혼을 받으시는 것을 보십시오. 아기를 낳고는 너무 예뻐서 포대기에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손이 우편 강도의 영혼을 안아 주는 그 사랑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육신의 고통과 고독을 다 잊어버리시고, 십자가상에서 한 영혼에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도 회개만 하면 그 따뜻한 손길이 우리 영혼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더 이상이 어디 있습니까?
우편 강도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인생이었습니다.
평생 직업이 강도였습니다. 그냥 강도가 아니라 살인강도입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모시고 살아가는 영혼이 됐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넘치는 예수님의 수고와 희생과 헌신! 운명하기 직전에 그 영혼 하나를 거두는 것을 볼 때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냉담한 돌 같은 심령, 딴딴한 무쇠 같은 심령이라도 녹일 수밖에 없는 뜨거운 사랑, 용광로 같은 사랑을 쏟는 것을 보십시오. 그냥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되뇌며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가슴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한 영혼을 전도 못했다면 막혀도 크게 막힌 것입니다.
“내가” “네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내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권세, 땅의 권세를 말합니다(마 28:18).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내가” 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죄악 된 인간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렸는데 “내가”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세상 끝날까지 “내가”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하늘의 권세, 땅의 권세를 아버지께 다 받은 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 그분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가!” 하실 때 하늘과 땅이 깜짝 놀랐습니다. 인류가 죄지은 이후로 이 땅에 왔다 간 사람 가운데 바로 이 우편 강도한테만 “내가!” 하셨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에 담지 못할 악한 말을 예수님께 퍼붓던 그 강도가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 죄를 사해 주십시오” 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진심으로 좌편 강도를 야단치고, 권고하고, 주님의 변호사 노릇을 했습니다. 죽어가는 와중에 “예수님이여,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고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절박하게 애원 어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온몸이 쑤시고 머리가 터질 정도로 아픈 가운데 이뤄진 위대한 회개입니다. 그때 하늘,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 장차 이르게 될 낙원과 구원에 대해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우편 강도에게 말씀하신 “내가!” “네게!” 하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입에서 “내가!”가, 바로 “네게”, 즉 우리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있는 지옥이 아니라 낙원을 주시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오늘’은 영원한 오늘입니다.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무덤에 들어가신지 사흘 만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우편 강도에게 하신 것이 맞지 않는 것 같죠. 예수님이 그날 무덤 속에 계셨는데 어떻게 ‘오늘’ 우편 강도와 낙원에 계셨겠습니까. 그러나 이 ‘오늘’은 인간의 시간과 날짜 개념의 오늘이 아닙니다. 날짜와 시간 개념이 없는 영원한 오늘입니다. 아담이 죄짓자마자 인류는 ‘오늘’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오늘까지 ‘오늘’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오늘’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오늘’이 됩니다. 만물의 주인 되시는 분(롬 11:36)이 나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내가! 네게! 오늘! 천국을 안겨주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 축복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뤄질 줄로 믿습니다.
사후死後 세계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만드시는 그 권위적인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겠다”(요 14:1-3).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 납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믿으면 생활이 달라집니다. 교회 나올 때 마음이 가볍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영원한 소망이 돼야 합니다. 천국을 못 믿을 때는 멀리멀리 있지만, 천국을 소망하면 바로 이웃집 같습니다. 친구가 없으면 대여섯 발짝 떨어진 이웃집도 먼 곳입니다. 그러나 대화가 되는 친구가 있으면 이웃집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친구들이 가 있는 곳이 천국 아닙니까. 바로 이웃입니다. 먼 곳이 아닙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모시지 않은 곳은 지옥입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하리니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빠져나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10년도 못 돼서 수많은 노비와 은금보화, 재물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재물 얻는 능(能)을 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신 8:18). 하나님이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살던 곳을 가 봤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구전(口傳)을 통해서 그 자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에는 아담과 하와의 무덤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집을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돈이 많은데 왜 돌로 집을 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은 임시로 우거(寓居)하는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세상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의 본향은 하늘나라이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나그네가 무슨 집을 짓습니까? 무엇 하러 집을 짓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경치 좋은 데 간다 해도 자기 집이 따로 있는데 거기다 집을 짓겠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제가 눈물 많이 흘렸습니다. 그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줄 깨닫고 세상을 호령하며 살았습니다. 오직 순례자로서 걸어가는 노정이었습니다.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버리고, 욕지거리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잠깐 세상을 지나가는 사람이요’ 하며 대꾸도 하지 않고, 섭섭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랑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습니다.
죽음 저 너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성(城)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 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빨리 가고픈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집 짓지 말자! 하나님의 뜻을 위해, 민족을 위해 일할지언정 세상을 위해 살지 말자’ 말하고, 가는 곳마다 기도했습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네게!’ ‘오늘!’ 이 세 가지를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2004년 4월 2일 사순절 특별성회 휘선(暉宣) 박윤식 목사 설교
- 22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