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下 「스룹바벨 성전과 귀환자들의 성별된 족보」 이렇게 읽자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下
「스룹바벨 성전과 귀환자들의 성별된 족보」
이렇게 읽자
1. 시대적 배경
2. 연대 계산 방식
3. 스룹바벨 성전과 구속사
4. 예루살렘 성벽과 구속사
5. 성별된 족보와 구속사
구속사(救贖史)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 역사다. 구속사는 수레바퀴 전체를 돌리는 속 바퀴이고, 세계사는 구속사에 의해 돌아가는 겉 바퀴이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를 통해 기록된 과거’로서, 시간과 공간의 무대 위에 놓여 있다. 구속사에 기록된 사건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 무대가 된 시간과 공간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토대 위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구속사적 경륜을 깨달아야 한다.
국제적 상황
신 바벨론 제국이 아직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자그로스산맥 너머에서 메대 제국이 발흥해 티그리스강까지 남하했다. 이때 메대의 왕이던 아스티아게스(주전 585-550)는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딸 만다네를 당시 작은 부족국가였던 피정복국 바사의 캄비세스 1세에게 시집보냈다.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가 아들을 낳으면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만다네는 사산한 아이와 아들을 바꿔치기해 가까스로 살리고 고레스(고레스 2세, Cryus II(Cyrus the Great))라고 이름 지었다. 고레스는 바사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엘람 전역을 장악했고,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삼촌인 다리오(키악사레스 2세)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켜 외조부 아스티아게스를 몰아내고 다리오를 왕으로 세웠다. 고레스는 뛰어난 용병술로 메대와 함께 신 바벨론 제국을 정복해 나갔다, 주전 539년 마침내 신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리오의 딸과 결혼하고 두 나라를 합병해 ‘메대-바사 연합제국’을 선포했다. 고레스는 형식적으로 60대(代)의 연장자였던 외삼촌 다리오에게 제위(帝位)를 양보했다가 이듬해인 주전 538년 제위를 넘겨받으며 바사 제국 창립을 공포했다. 고레스 2세는 아스티아게스의 피정복민 압제 정책을 모두 철폐해, 피정복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리고 유대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을 포로에서 해방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고레스 칙령이 선포되고 유대인들의 포로 귀환이 시작된다.
유다 주변의 상황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유다 지역에는 앗수르 제국 당시 이주해온 많은 이방인과 혼혈족들이 완전히 터전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유다가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제1차 귀환자들이 도착해 스룹바벨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 이들은 자신들도 이스라엘 민족과 피가 섞여 하나님을 믿고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니 성전 역사에 동참시켜 달라고 요청한다(스 4:1-2). 그러나 이것이 귀환자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을 혼잡케 하려는 계책임을 간파한 스룹바벨과 족장들이 거절하자, 주변의 관리들을 매수해 성전 공사를 끈질기게 방해했다.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 선포를 통해 성전 공사가 재개됐을 때도 이들은 당시 바사 왕이던 다리오 1세에게 ‘고레스 왕이 진짜로 성전 건축을 지시했는지’ 조서를 통해 물으며 방해를 이어갔고(스 5:1-17), 이후 아하수에로(주전 486-465/464)와 아닥사스다(주전 464-423) 왕 시대에 예루살렘에 성벽을 건축하고자 할 때마다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방해했다(스 4:6, 7, 8-23). 당시 바사 왕들은 유다의 종교적 지도자로 학사 에스라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공식적 정치 지도자는 임명하지 않았다. 반면 귀환자들을 방해한 대적들은 총독과 귀족들, 부유한 거상들이었기에 귀환자들의 성벽 재건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제3차 포로 귀환 시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닥사스다 왕 제20년(주전 444년) 기슬르월(9월)에 성벽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느 1:1-3) 약 4개월간의 기도 끝에 니산월(1월)에 아닥사스다에게 나아가 예루살렘 귀환과 성벽 재건의 허락을 받았다(느 2:5-8). 아닥사스다는 느헤미야를 대적들과 같은 ‘총독’으로 임명해 예루살렘으로 보냈다(느 5:14). 대적들은 왕의 조서를 전달받고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며 심히 근심했다(느 2:9下-10).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대적들의 방해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당시 유다는 대적들에게 동서남북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유다 북쪽의 사마리아 총독이었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유다 동쪽의 암몬 사람 도비야는 느헤미야 귀환 전 유대 지역의 유력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면 지배력을 상실하게 될까 봐 적극적으로 성벽 재건을 방해했다. 유다 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있었는데(느 6:6, ‘가스무’), 아라비아 상인들은 당시 아시아(바사), 유럽(헬라)과 아프리카(애굽)을 오가는 국제 무역로 중앙에서 막대한 부를 독점했다.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벽과 유다 총독의 존재는 독점권의 상실을 의미했다. 유다 서쪽에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블레셋의 아스돗 사람들이 끊임없이 유다를 괴롭혔고,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과 연혼해 이방 신을 섬기게 만들었다. 느헤미야는 매우 어려운 성벽 중수 작업을 감당할 뿐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에워싼 대적들과 내부의 대적들의 공격까지 이겨내야 했다.
성벽 재건 초기
주전 444년 아브월(5월) 4일, 느헤미야와 귀환자들은 예루살렘의 열두 문을 기준으로 42구역을 나누어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드고아 귀족들은 무거운 돌을 나르며 공사하는 일을 비천한 일로 여겨 동참하지 않았다(느 3:5). 유다를 둘러싼 대적들은 ‘저들은 절대로 성벽을 완공할 수 없을 것이며, 저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며 조롱했다(느 4:1-5). 그러나 대적들의 예상과 달리 42구역이 하나로 연결되고 성벽 높이가 마침내 절반에 미쳤다(느 4:6).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는 약 12m로, 약 6m의 높이까지 건축된 셈이다.
성벽 재건 중반
대적들은 본격적으로 성벽 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산발랏과 도비야, 아라비아, 암몬, 아스돗 사람들은 군대를 동원하고 사면으로 예루살렘을 에워싸 진을 치고 위협했다(느 4:7-9).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받아 정식으로 임명받은 총독이었기에, 대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곧 왕에 대한 반란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전쟁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위협을 통해 내부의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키려고 군대를 동원했던 것이다. 성벽 공사를 하던 귀환자들은 고된 일에 대적들의 위협까지 커지자 금방 낙담하고 말았다(느 4:10-11). 대적들의 진 근처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열 번이나 예루살렘에 찾아와 당장 공사를 중단하고 각 지역으로 돌아와 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에 참여하는 자들을 무장시켜서 병기를 잡고 일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지시했다(느 4:13, 16-18).
잠시 상황이 안정되어가는 듯 보였으나, 이번엔 빈궁한 자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동족인 이스라엘인들에게 거액의 빚을 지고 고액의 이자를 지불하며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느 5:1-5). 신명기 23:20에는 “타국인에게 네가 꾸이면 이식을 취하여도 가하거니와 너의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얻을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고 동족 간에 취리(取利)해서는 안 될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말씀에 따라 느헤미야는 동족 간에 이자 받는 것을 금지하고 서로 이자를 탕감하게 해 다시 공사를 진행할 수 있게 했다(느 5:6-13).
성벽 완공 직전
어느덧 예루살렘 성벽의 퇴락한 곳이 모두 보수되고 거의 모든 공사가 마무리됐다(느 6:1). 성문에 문짝을 달기만 하면 모든 공사가 마치는 상황, 막바지에 대적들의 공격은 더욱 치밀하고 매서워졌다. 산발랏과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느헤미야를 죽이지 않고서는 공사를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네 번에 걸쳐 만남을 제의했다. 느헤미야를 성벽 밖으로 불러내 암살하고자 하는 사악한 계획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그 사실을 간파하고 제안을 거절했다(느 6:2-4). 그러자 산발랏은 ‘네가 모반의 계획을 꾸민다는 소식이 있는데, 함께 논의하자’며 인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 유언비어를 퍼뜨리려고 했지만, 이 역시 느헤미야가 거절했다(느 6:5-9). 그러자 대적들은 내부의 변절자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대적들은 제사장이 아닌 느헤미야가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에서 중죄임을 알았다(대하 26:18-21). 제사장 스마야에게 뇌물을 주며 느헤미야를 성소에 들어가게 하려고 시도하고(느 6:10-13), 여선지자 노아댜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가 느헤미야를 헐뜯게 했으나(느 6:14) 모든 궤계는 실패했다. 마침내 성벽 역사는 52일 만인 엘룰월(6월) 25일에 마무리됐고, 모든 대적과 사면을 에워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대역사를 깨닫고 두려워하며 크게 낙담했다(느 6:15-16).
성벽 완공 이후
성벽 공사를 마친 후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이방은 완전히 구별됐다(느 11:1, 18). 더 이상 대적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없게 됐지만, 귀환자 가운데 변질된 자들을 통해 내부로부터의 공격을 계속했다.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과 총독 임기를 마치고 바사로 돌아갔다가, 12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찾았을 때 유다 북쪽의 산발랏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를 사위로 삼았고(느 13:28), 유다 남쪽의 암몬 사람 도비야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통해 성전에 방을 얻어 거하고 있었다(느 13:4-9). 유다 서편의 아스돗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과 계속 연혼했다(느 13:23-27). 또한 레위인들의 소득(십일조)이 끊어져 레위인들이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고(느 13:10-14), 안식일에도 여전히 장사와 노동이 이어졌다(느 13:15-22). 느헤미야는 이러한 악을 모두 제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느 13:29-31).
느헤미야의 사명 완수와 남아 있는 구속사 완성의 비전
느헤미야서 마지막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이 사명을 완수했음을 아뢰며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내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고백했다(느 13:31). 이 고백은 느헤미야가 어린아이처럼 칭찬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내외부의 모든 대적들의 공격이 멈추게 될 소망의 날을 향한 간구의 고백이다. 새 언약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성전이 회복되고 신앙 개혁과 성벽 건축까지 전 과정이 완성됐지만, 여전히 대적들은 우는 사자같이 사방을 에워싸고 언약 백성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에서는 대적과의 전투가 치열하게 이어지지만, 훗날 참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속사의 드높은 성벽이 완공되면 그 어떤 대적도 남아 있지 못하고 완전한 평안의 세계가 완성될 것이다.
에스겔 28:25-2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열방에 흩어 있는 이스라엘 족속을 모으고 그들로 인하여 열국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그들이 고토 곧 내 종 야곱에게 준 땅에 거할지라 26 그들이 그 가운데 평안히 거하여 집을 건축하며 포도원을 심고 그들의 사면에서 멸시하던 모든 자를 내가 국문할 때에 그들이 평안히 살며 나를 그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리라”
정리_정정원 목사
- 22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