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말씀과 메타버스
참평안 칼럼
바나나 말씀과 메타버스
‘바나나 말씀을 듣고 평강제일교회로 오게 됐다’는 간증을 ‘참평안’에서 재미있게 읽은 적 있다.
“하늘나라는 바나나 먹고 싶다고 생각하면, 내 입에 벌써 바나나가 들어와 있는 세계다. 그 나라에서는 ‘집사님!’ 하고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생각하면 벌써 그 집사님이 내 앞에 와 있다.(이사야서 65:24) 지금은 서울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로 13시간 가지만, 그 나라에서는 순간 이동이다.(에스겔서 1:14)” 원로목사님(휘선 박윤식 목사)의 이 설교를 워낙 많이 들은 우리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 성도는 이 말씀으로 천국을 가장 쉽고 피부에 와 닿게 느낀 것이다.
디지털 세상은 천국의 모형?
그런데 이런 세계가 디지털을 통해 현실화하는 듯한 조짐이 보인다. 요즘 뜨거운 화두가 메타버스(metaverse:가상의 우주라는 뜻)다. 가상현실 세계인 메타버스에 입장하면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어 회의에 참석하고, 콘서트에 가서 열광할 수도 있다. 현실에선 회사에서 콘서트장까지 한참 걸리지만, 메타버스에서는 클릭 한 번에 이동이다. 공간과 시간이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AI(인공지능) 기술로 우리는 디지털 세상에서 영생할 수도 있다. AI는 딥러닝으로 우리와 똑같은 얼굴, 목소리에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디지털 분신을 만든다. 우리가 죽어도 이 분신은 디지털 공간에서 영원히 산다. 이미 사망한 가수 김광석이 살아있는 아이유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최근엔 3년 전 사망한 셰프 앤서니 보데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감독이 그의 독백을 AI 기술로 만들어 넣었다. 생전의 목소리인 줄 알았던 팬들이 뒤늦게 이를 알아차리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생명나무의 길을 위협하는 그들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고, 이들이 동산 중앙 ‘생명나무’ 실과까지 따먹을까 봐 그룹과 화염 검으로 막으셨다. 하나님을 닮아 선만 알아야 할 인간이 악까지 알게 됐으니, 이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하면 그것은 재앙이다. 그런데 마침내 인류가 이제 생명나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생명공학 기술로 신체 장기들까지 갈아 치우고 영생에 들어갈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생은 이런 게 아니다. 인류의 죄성(罪性)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뒤 생명나무 열매를 먹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피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을 찢으시고 생명나무의 길을 여셨다(히 10:20). 이 유일한 길을 무시하고 생명나무 실과를 노리는 디지털! 그 정체는 무엇인가.
디지털은 과연 무엇인가?
디지털은 0과 1로 이뤄진 기술이다. 이 두 가지를 배치해 엄청난 물질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가상의 세계까지 물질화한다.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가상현실(VR) 스튜디오에서, 실존하는 인간 앵커가 뉴스를 전한다. 가상화폐 시가총액은 하룻밤 새 수십조 원이 늘었다 줄었다 한다. 이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0은 ‘없음[無]’이다. 1은 ‘있음[有]’이다. 그런데 디지털은 0과 1 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계를 생각해 보자. 어릴 때 보던 아날로그 시계는 초침이 0초와 1초 사이를 같은 속도로 꾸준히 이동해 건너간다. 이런 시계는 이제 찾기 어렵다. 디지털시계는 초침이 0초와 1초 사이를 한꺼번에 건너뛴다. 아날로그 세상은 0부터 조금씩 쌓여서 1이 되지만, 디지털은 순식간에 무가 유가 되는 것이다.
이런 디지털 세상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세계와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드신다. 눈에 안 보이는 ‘말씀’으로 눈에 보이는 ‘만유(萬有)’를 순식간에 창조하셨다.
불교의 반야심경에는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이런 얘기다.
공(空) : 눈에 안 보이는 것 = 에너지 = 불교적 이상 세계
색(色) : 눈에 보이는 것 = 물질 = 현실 세계
그런데 이 둘이 사실은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성리학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도 ‘이’와 ‘기’가 결국 하나라는 뜻이다. ‘이’는 ‘공’과 통하는 개념이고, ‘기’는 ‘색’과 통하는 개념이다.
이(理) : 만물의 본질적 존재
기(氣) : 만물의 현상적 존재
유물론자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지만, 눈에 안 보이는 그 무엇이 세상의 원천이라는 걸 이미 동양의 종교와 철학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첨단 과학도 마찬가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질량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산화해 없어졌다 해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주 공간에 에너지로 변화해 존재한다”는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람이 죽으면 영영 사라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사람을 부활시키고 변화시키신다. 마른 뼈들에 힘줄, 살, 가죽이 붙고 생기가 들어가 순식간에 큰 군대가 된 에스겔의 환상처럼 말이다(겔 37:1-10).
말씀과 디지털의 차이점
시공간의 한계가 없어진(또는 줄어든) 디지털 세계를 체험하게 됐다는 것은 구속사(救贖史) 완성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맛보기’일지도 모른다. 천국의 도래가 가까웠다는 사인(sign) 말이다. 그러나 말씀의 세계와 디지털 세계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색’을 ‘공’으로, ‘기’를 ‘이’로, ‘이 세상’을 ‘오는 세상’으로(고전 13:10-12) 만드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위해 길이 참고 기다리시면서 당신의 열심(熱心)으로 구속사를 이끌어 오셨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은 그것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에 있다. 하나님이 아담 타락 후 왜 세상을 곧바로 고치지 않으셨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이 인내하시지 않고 곧바로 심판하고 바로잡으신다면, 우리 중 여기 남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0에서 1로 건너뛰지 않으신다. 아날로그 시계바늘처럼 우직하게 걸어 0과 1의 사이를 채우신다. 광야 40년간 그러셨고, 지난 6천 년 동안 그러셨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다. 원로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시계바늘 ‘똑’ 하는 순간만큼도 쉬지 못하고 일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이 없는 메타버스, 디지털 영생은 선악과일 뿐이다. 구속사 완성의 성전인 에스겔 성전에는 거룩해지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서도 안 되고, 들어갈 수도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닮자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에는 모두 ‘사이 간(間)’이 있다. 하나님이 0과 1 사이를 당신의 피, 땀, 눈물로 채워가시듯, 우리도 사이를 채우고 과정을 채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배, 기도, 전도, 사랑, 인내다. 사이를 채워야 구속사가 이뤄진다. 서로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용서해 주고, 마주 앉아 대화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볼 때 마땅치 않고, 성깔 낼 만하더라도 참고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하는 마음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 것처럼(골 1:24-25) 교회와 성도의 좋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자기가 걸머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2011년 1월 1일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중
글_호준석 장로
- 21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