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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다 귀한 생명

2021.04.24 23:35

천하보다 귀한 생명
신명기 8:1-6, 마태복음 16:26

성화_문재연 성도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땅을 준대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생명,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한 생명을 헌신짝같이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아이를 낙태하는 것은 무서운 살인죄입니다. 총과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죄입니까.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핏덩어리인 태아를 낙태시켜 쓰레기통에 던지면 그 아이들이 ‘하나님!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나는 바로 무덤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10여 년 전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젊은 산모가 심한 출산 장애 끝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더라도 심한 장애를 겪으면서 10년가량 살 것으로 예상되고, 수술을 안 받으면 1년 안팎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수술 안 하는 것을 선택했고, 결국 6개월 만에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이냐’ 하는 근본적 문제가 이 사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시간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자식을 낳았느냐’고 합니다. 주위에서는 ‘조상이나 부모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겠지’라고 수군거립니다. 자식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10년이라는 기간은 부모와 가족들에게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이 하나에게 모든 가족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어쨌든 죽을 아이가, 살아도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하는 지경인데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낫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를 통해 우리 가문에 큰 영광이 되고, 오늘날까지 조상들이 믿지 못한 큰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이 아이를 나에게 주셨다’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범사(凡事)에 감사’는 기분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암담하기 짝이 없고 앞이 캄캄해 해결할 길이 없는, 죽을 지경인 순간에도 감사하는 것이 ‘범사에 감사’입니다.

옛날에는 어머니들이 바가지에 쌀을 씻은 뒤 체로 쌀과 돌을 걸러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걸러내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것에 대해 후회함이 없습니다(롬 11:29). 조각가가 자기 구상대로 작품을 만들지만, 마음에 안 들면 때려 부수고 다시 만듭니다. 이것이 인간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하신 뒤 “내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셨습니다. 거기에 싫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자식을 통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은혜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가셨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불쌍한 소경이 ‘한 푼 줍쇼’하고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배타심이 강한 예수님 제자들은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신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소경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고 답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기분,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나쁜 놈’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쁜 놈’도 자기 마음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입니다. 한 생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듣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 사랑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더욱 감사하십시오. 불평하고 원망하고 탓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를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통해서 한번 다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살려 주셨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봐서는 당장 벼락을 내리셔서 멸망시키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생각하셔서 하나님이 그들을 살게 하셨습니다(시 105편). 신앙을 이루고, 계승하는데 반드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출발한 뒤 계속 불평, 불만이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주머니에 넣으니 문둥병이 생기고, 다시 넣으니 나은 것을 비롯해 세 가지 권능을 그들이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나를 품으면 문둥병자같이 되고, 예수님이 품으시면 완전히 정결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예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내린 10대 재앙도 다 지켜봤습니다. 애굽 천지에는 3일 동안 캄캄한 흑암 재앙이 내렸는데, 이스라엘이 사는 고센 땅은 해가 환하게 뜬 밝은 낮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다 목도하고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하자마자 ‘모세가 죽일 놈’이니 뭐니 하며 떠들어댔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가서 40주야를 물도 떡도 먹지 않고 간절히 기도해 하나님이 돌을 깎아 직접 써주신 축복된 규례,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신(邪神) 우상(偶像)을 만들어 춤추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내던지고 그것을 갈아서 마시게 했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시겠다고 할 때마다 80세, 늙은 모세가 꿇어 엎드려 먹지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을 죽이시면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듣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살려 주셨습니까? 그들이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길을 걸을 때 하나님도 함께 걸으셨습니다. 천막 칠 곳을 일일이 지정해 주시고,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독수리 날개로 이스라엘을 업어 인도했다고 하셨습니다(출 19:4-6). 하나님이 ‘40년 동안 너희들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고 상한 것, 고통스러운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한탄하셨습니다(시 95:10, 신 9:7,11, 신 31:21, 삿 2:17, 호 9:9-10).

우리도 아들딸이 속 썩이면 집에 들어올 때 순간적으로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습니까. 가문을 망신시키고, 직장에서도, 친구들에게도 망신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당장 벼락을 쳐서 죽이지 않으시고 ‘생명은 시간 보다 우선시돼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40년 세월을 보내셨지만, 하나님께는 생명이 시간보다 우선입니다. 밤낮 죄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모든 욕설과 배신과 원망을 들어가면서도 품고 가셨습니다. 장막 안에서까지 ‘모세 저놈이 왕 노릇 하려고 하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있다더니, 나와 보니 허허벌판에 바람 불고 먼지밖에 더 있냐’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욕했습니다(신 1:27). 하나님이 당장 죽이실 수도 있죠. 그러나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시간보다 생명을 우위에 놓고 계시는 하나님, 그 넓은 사랑과 자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한 번 믿지 못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는데, 여러분은 수시로 기분 좋으면 교회 나오고, 기분 나쁘면 교회 욕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낳아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데 24년이나 걸립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 긴 시간을 기쁘게 감수합니다. 옷 한 벌 사 입지 못하고 떨어지면 기워 입으면서 자식에게는 새것을 입힙니다. 남의 집에서 밤잠 못 자고 일해서 번 돈으로 자식 등록금 대 주고, 책 사주고, 참고서 사주고, 옷을 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습니까. 효도하면 장수합니다. 효도 안 하면 수명의 반밖에 살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부모가 그 긴 시간을 견디는 것은 시간의 무게보다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들딸의 생명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의 고생을 싹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온 세상을 준대도 목숨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의 무게를 이 지구의 무게보다 무겁게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합니까?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하나님, 돈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를 찾아 온 집을 뒤지시는 하나님, 속 썩이고 집을 나가 가산을 탕진한 탕자 하나도 찾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남은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놓아두고 산 넘고 강 건너 골짜기를 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모색하는 경제효과와는 상반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피곤한 밤에 긴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한 마리 양에게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 길 잃은 양은 분명히 목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나쁜 양입니다. 그런데도 그 한 마리를 찾아 여기저기 찾아 헤매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의 생명을 시간보다 위에 두고 계십니다.

제가 늘 말하죠. 시내 나갔다가 지하도 입구에서 덜덜 떨며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있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돈을 주고 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얼마 드렸습니까?” 천 원 줬다고 하면 말합니다. “다시 다녀오세요. 천 원으로 짜장면 한 그릇, 곰탕 한 그릇 못 먹지 않습니까. 거지처럼 보이지만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병들고 헐벗었을 때 너희들이 나를 외면하지 않았느냐” 하시니 사람들이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자, “어린아이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을 대접할 때 하나님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누굴 만나 식사 대접하고 나서 ‘괜히 만나서 돈만 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인생입니다. 돈이 없을 때는 서로 얼마 있는지 솔직히 얘기하고 나누고 보태서 먹으면 됩니다. 실컷 먹고 나서 이빨만 쑤시다가 남이 계산하면 뒤늦게 따라 나오면서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하나님 같이 대접해야 합니다. 무엇을 줄 때 예수의 이름으로 줘야 합니다. 그러면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주려고 하면 ‘좀 아낄걸, 조금만 줬어도 될걸’하는 마음이 들지만, 하나님같이 대접한다고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없어집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 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짠돌이가 돼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헌금을 그렇게도 아낍니까. 햇빛, 달빛 없으면 우리는 죽은 목숨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1분도 못 삽니다. 흙의 기운이 우리의 생기를 돋워 주고 질병을 물리쳐 줍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합니다. 아파트에서도 베란다 한구석에 아랫집 새지 않도록 흙을 놓으면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거저 주셨는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장애 있는 사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멸시하는구나’ 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변두리 인생, 냄새나는 인생, 나보다 못 배우고, 부러워할 만한 것 하나도 없다며 외면하고 배척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내가 창조했다. 내가 만든 생명이다. 네가 나를 멸시하겠느냐’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저는 지금까지 성경을 1,700번 이상 읽었습니다. 칼 바르트가 뭐라고 말했고, 존 칼빈이나 요한 웨슬레가 뭐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예수님 가라사대!”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고로 말씀이 하나님이다” 라고 요한복음 1:1에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고 말씀으로 명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죄를 사하셨고, 말씀으로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들과 어울리시고, 포도주를 드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네가 진짜 하늘에서 왔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하셨습니다(마 11:19). “너희가 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행동한 것을 칭찬하지 않고 꼬투리를 잡아 욕지거리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관대작, 돈 많은 부자만 생명으로 보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똑같이 보신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어두운 데서 후레쉬(손전등)를 켜면 사물이 다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가난한 사람, 부자가 따로 어울리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일수록 선한 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선한 일에 열심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엡 2:10, 딛 2:14).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켰으면 충분히 대가를 줘야 합니다. 그런다고 그 집이 망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충분히 받은 사람은 고용주를 칭찬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복이 됩니다. ‘이만큼 일했는데 이것밖에 안 줘? 두고 보자’ 하면 그 사업은 얼마 못 가 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일도 안 하고 고용주의 돈만 빼먹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살후 3:10).

부자의 영혼도, 가난한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대통령의 인격이나, 서울역 지게꾼의 인격이나 같은 인격입니다. 부자가 몇천만 원짜리 관을 써서 장례식을 치르고, 가난한 사람은 몇십만 원짜리 관을 쓰지만 땅에 들어가서 썩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주위 분들에게 “내가 죽으면 비싼 관 절대 쓰지 마세요. 땅에 들어가 썩는데 왜 비싼 걸 씁니까. 하늘나라는 예수님 믿는 믿음으로 가는 세계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 울지 마세요. 50평짜리 아파트 살다가 100평짜리 아파트로 이사 가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런데 지구에 임시로 파견 왔다가 온통 다이아몬드이고 제일 흔한 게 금인 영원한 세계에 가는데 울긴 왜 웁니까?” 라고 말합니다. ‘천국 환송(歡送) 예배’입니다. 주가 맡긴 역사를 힘을 다해 마치고 맑고 밝은 천국에 입성할 때, 수많은 천사가 우리를 시중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아주 존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도 원수같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잘 가꾸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밖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잘 보일 생각하지 말고, 집에서 배우자에게 잘 보이도록 단정하게 가꾸십시오. 배우자에게 잘해 드리세요. 어떤 분은 남편이 예수님 안 믿고 술 마시고 다닌다고 마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귀가 벌어온 돈으로 왜 밥 먹고 삽니까.(폭소) 믿지 않는 배우자의 생명도 참 존귀합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모를 뿐입니다. 자신의 선행과 생활, 행실로 감동, 감화시키면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오게 돼 있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고, 어떤 물질이나 시간보다 생명을 위에 놓는 온 집안을 만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안락과도 바꿀 수 없다.

사람들은 편안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못 먹고 못 입으며 힘들게 번 돈으로 늘그막에 편안하게 살자는 것이 사람들이 꿈꾸는 안락입니다. 죽는 것도 편안하게 죽자는 ‘안락사’가 화두입니다. 병들고 늙고 외롭고 자식들도 다 배신해 돌볼 이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시키는 영화를 본 적 있습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 명만 죽인 것이 아니라, 동족 23만 명도 학살했습니다. 똑똑하지 못하고, 살아도 국가에 손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붙잡아 죽인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잠 20:27)이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 남이 노력해 얻은 것에 붙어먹기만 하는 사람은 죽는 게 낫다는 것이 히틀러의 지론이었습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생명 자체의 존엄성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을 물질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며, 말씀의 권세와 능력을 망각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돌연변이나 진화 같은 자연 발생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성을 다해 존귀한 형상으로 창조하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창조 후 “내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라’라는 세 가지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지만, 사람에게 다 맡겨 경영하게 하시고 만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창 2:19-20).

여러분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분이라는 것!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절대 잊지 마십시오. 저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결함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다 병든 자요, 죄인입니다. 만약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의 리스트를 만든다면, 여러분이나 제 이름도 거기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한마디로 ‘누구도 잘난 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너를 낮추시며, 겸손하게 경건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언제부터 권세, 명예, 돈이 있었습니까. 재물 있는 분들은 가난한 분들을 더 사랑해서 생활의 터전을 보태 주시고, 일 잘하는 사람을 내 친자식 보다 아끼며 회사의 보배로 인정하고 그만한 대가를 치러 주십시오. 그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 안락한 생활을 못 하고, 세 끼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을 사람들은 무시하고 도외시하고 외면합니다. “저 아이와는 놀지 말아라, 우리 집에 데리고 오지 말아라” 합니다. 생명의 가치를 ‘잘 살고, 못 살고’, ‘많이 배우고, 못배우고’, ‘생활이 안락하고, 그렇지 못하고’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고, 빈손으로 갑니다(딤전 6:7).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딤전 6:10).

하나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참고 돌보셨습니까. 만나 먹기 전에도 불평, 먹은 뒤에도 불평이었습니다. 모세가 그걸 다 참았으니 얼마나 위대합니까. 마지막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사람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것 하나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도 마태복음 4:4과 누가복음 4:4에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요 1:1). 이 존귀한 생명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존귀한 생명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죄짓지 않기 위해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읽으면서 선한 일에 열심 하는 백성이 되십시오. 말을 할 때도 남을 깎아내리고 ‘나쁜 놈이다, 도둑놈이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저 영혼, 저 생명을 붙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200만 명을 모세가 하나님의 위대한 권세와 능력으로 이끌고 나왔습니다. 만나 먹기 전이나 만나 먹을 때나 악한 말로 늘 원망한 백성들, 수준 이하의 인간들을 광야 교회에 끌고 나오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부르짖고, ‘이 백성을 죽이지 말고 살려 달라’ 라고 기도하며, ‘만약 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돼 있다면 내 이름을 빼 주시고 이 백성과 같이 죽든지 살든지 하기를 원합니다’ 하며 애타게 부르짖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 그는 언제나 생명을 시간이나 물질보다 더 상위에 놓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고하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도 이제부터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물질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말씀! 주신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귀하게 여기면서 신앙생활 잘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받아 자손만대에 예수의 이름이 떠나지 않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죄짓지 않고 선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때로는 물질에, 때로는 여자, 남자에게 유혹받아 마음속에 죄지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시고, 말씀의 권세와 능력,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고 불담이 되셔서 우리를 영육 간에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늘 말씀 충만,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세상에 나가서 죄짓지 않고 맡겨진 사명에 정성, 진실, 충성, 정직을 다하는 가운데, 돈도 벌고 은혜 받고 하나님 사업에 더욱 힘쓰는 귀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한 대로 이뤄질 줄 믿고 확신하면서, 모든 말씀 빌고 원하올 때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감사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2006년 2월 26일 주일 2부예배 휘선(暉宣) 박윤식 목사 설교

 

  • 2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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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2 ‘열방을 향하여 구속 경륜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의와 영광의 빛을 발하자’ 2026 하계 대성회 2026.09.01
2951 성막 화첩의 인기에 힘입어 번역 출간된「신묘한 영광의 비밀, 성막과 언약궤」 구속사 시리즈 제9권 영문판·일어판 출판 감사예배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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