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인내
소망의 인내
로마서 5:4-5, 데살로니가전서 1:1-8
이 험악한 세상은 우리의 바람처럼 잘 풀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소망이 없는 사람은 더 바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所望)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소망은 바 소(所), 바랄 망(望), ‘바라고 기대한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시 39:7). 둘째,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합니다(시 33:20, 미 7:7). 셋째, 구원을 대망(待望)합니다(눅 2:28~30). 넷째, 구원을 바라되, 구원이 완성되기를 소망합니다(행 24:15). 다섯째,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히 11:1). 여섯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합니다(롬 8:24, 벧전 1:13). 일곱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롬 8:25). 여덟째,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롬 5:4). 아홉째, 소망은 언제나 믿음과 사랑이 함께 합니다(고전 13:13). 열 번째, 하나님께서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딛 1:2, 요일 2:25).
오늘 본문인 여덟 번째 말씀처럼, 예수님은 소망은 인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눅 8:15). 이 원리를 잘 보여주는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제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 도착해 유대인의 회당에서 3번의 안식일(21일) 동안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가르쳤습니다. 많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고, ‘가이사 대신에 예수라는 다른 왕을 선전하는 반역자’라며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피신했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숨어서 예배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주후 52년경, 사도 바울은 박해 가운데 탄생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환란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바울은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이 칭찬하고 사랑했습니다(살전 2:17).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믿습니다’ 해 놓고 일을 안 하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14-17).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인정하셨듯이 믿음에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창 22:12). 믿는다면 일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쉴 새 없이 일하는 교회,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사랑하면 많은 시간과 물질이 없어집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실 때 고통으로 희생하시면서 기꺼이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랑하여 환란 가운데서도 사랑의 수고를 했던 교회였습니다. 불쌍하고 힘든 이웃을 도우려는 마음만 가진 것은 사랑의 수고가 아닙니다.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으려고 나아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미루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곧 행하셨습니다(막 5:29, 10:52). 사랑은 당장, 곧 시작하는 것입니다.
셋째,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하루 앞두시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말씀하셨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과 밥 먹을 겨를도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 가운데 인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터지고 맞고 창으로 찔림을 인내하고 자기 아픈 것을 잊어버리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며 용서하셨습니다(눅 23:34). 우리도 그 사랑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내 자신이 완전히 죽고,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갈 2:20). 그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소망의 인내가 없는 사람은 육신적, 정욕적이어서 늘 싸움을 일으키며, 교회에서도 열매가 없습니다. 마지막 환란 때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구원의 열매가 있지만 견디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을 배신하게 됩니다(마 10:22).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500만 유대인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가운데도 재정을 관리하는 회계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소망(엡 1:18)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자 많은 제자들에게 걸림이 되어 다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하고 묻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였습니다(요6:41-69). 시험과 환란 중에도 인내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갖고 끝까지 달려가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70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연주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극장에는 자정이 넘으면 연주를 할 수 없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교향곡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마지막 한 곡을 남겨 놓고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습니다. 단원들이 다 떠나고 12명만 남았습니다. 베를리오즈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열정과 집념은 12명의 단원이 포기하지 않고 연주하게 했고,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 특수부대 308부대가 독일 군사 기지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갔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25명이 죽고 275명이 포위당했습니다. 무전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아군의 포격은 오히려 308부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통신용으로 훈련한 비둘기 2마리에게 편지를 묶어 사령부로 날려 보냈지만 한 마리는 총에 맞아 죽고, 한 마리는 겁에 질려 나뭇가지에 앉아 날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나무 위로 올라가 비둘기를 다시 날려 보내다가 전사하고, 비둘기도 한쪽 눈에 총을 맞았지만 끝내 사령부까지 날아가 편지를 전해 주고 죽었습니다. 그 비둘기는 이후 십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 4:7-8)고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비둘기가 총에 맞았지만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고 훈장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도 믿음으로 끝까지 달려가는 모습을 보시고 친히 의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달려가야 합니까? 하늘의 본향을 사모할 때,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십니다(히 11:15-16).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신앙가들은 나그네 같은 삶을 살면서 육신의 고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초지일관의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그네 같은 삶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라톤을 달리는 천국의 국가 대표선수입니다(고후 5:20). 비지땀이 흐르고, 발은 마비가 와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허다합니다. 경제적 곤경, 친구의 배신, 의도치 않은 사고나 그릇된 선택으로 불행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대표 선수가 힘들다고 도중하차해버리면 나라 전체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철두철미하게 회개하고, 하늘나라의 대표선수, 땅에서는 평강제일교회 대표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어림없는 상황에도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정직과 성실을 구하며 끝까지 믿고 달려보겠다는 집념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마라톤 신앙’ 즉, 소망의 인내가 있을 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도 가능합니다.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밥을 사 주고, 환영해 주고, 시간을 투자하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에 속상하고 낙심하기도 하지만 소망의 인내로 참아내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보기 위해 길이 참아 비를 기다림 같이, 욥 같은 선지자들이 고난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결말을 본 것 같이, 소망의 인내를 가진 자는 복됩니다(약 5:7-10). 소망의 인내가 없는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지만 일하지 않기에 믿음의 역사가 없고, 사랑의 수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응답도 열매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마귀가 주는 환란이 있습니다(계 2:10).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려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초점이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고전 10:31).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핍박 중에도 소망의 인내로 참고 견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고하며,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의 역사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천국의 국가대표, 평강제일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4년 10월 13일 수요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 2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