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근원根源’을 찾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 (이지운 장로)
작가 미상의 노래는 안타깝다. 어떤 사연으로 이런 가락과, 노랫말이 탄생한 걸까? 얼마나 오래됐을까? 어떻게 전해진 걸까? 처음 음률과 서정(敍情)은 얼마나, 어떻게 변형되었을까? 이 노래가 이때로, 내게로 오기까지 사연들도 궁금하거니와, 혹 소실되었을 작가의 처지와 심경에 아쉬움이 더하다.
책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래도 독자는 저자(著者)를 찾게 된다. 저자를 알고 나면 책이 더 잘 이해되고, 느껴지기 마련이다. 시(詩)도 지은 이가 낭송할 때 특별하다. 저술(著述)은 저자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와의 대화’ 시간도 갖는다. 저술 배경과 의도는 무엇인지, 특정 표현과 관점은 어떤 인식의 흐름에서 왔는지, 사건과 일에 대한 저자의 시각과 해석은 어떠한지를 탐구한다. 저자(著者)는 저서(著書) 이상이다. 노벨 문학상을 저서가 아닌 저자에게 주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구속사 시리즈>는, 이런 점들을 적용해보면 참으로 기이한 사례이다. 성경을 ‘학문적’ 영역에서 다룬 책이 시리즈물로 나와, 이렇게 장시간, 누구나(교수, 교역자, 신학생, 평신도)에게, 이렇게 널리 읽힌 적이 있는가 싶다.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특별한 현상을 보이며 독보적인 위상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구속사 시리즈가 갖는 책으로서의 우수한 가치는 그 내용들이 책 안에 갇히지 않고 널리, 두루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성경을 읽으려다가도 다시 덮게 만든다”는 ‘창세기 5장 족보’를 한국 기독교계가 언제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가? 노아 방주 건조 기간이 120년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제부터 확인되었던가? 아담과 그 9대손 라멕이, 노아와 그 10대손 아브라함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언제부터였는가?
그런 덕분에 ‘창세기 5장 족보’를 비롯해 <구속사 시리즈>의 콘텐츠는 한국 교계에서 보편화되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두루 설명되어 있으며 이런저런 성경 강의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족보’ ‘구속사’ ‘경륜(經綸)’ 등 표현이 자연스러워졌고, 기독교TV에서도 듣게 되며,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신명기 32장 7절)는 권고를 자주 받게된 것도 <구속사 시리즈> 이후의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분명 2007년 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 발간 이전에 주지(周知)되지는 않았다. 이 책은 이런 대목들에 “유구한 역사 속 세계 최초”라는 라벨을 달아 놓았다. 라벨들은, 2021년 1월 현재 11권까지 나온 평균 400쪽이 넘는 책들에 넘쳐난다. 이 라벨들이 잘못 달렸다면 그에 합당한 이의가 분명 제기됐을 것이고, 지금까지 십수 년을 그 라벨을 달고 출간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노아방주 120년설’은 이전까지 국내외 거의 모든 성경 주석과 사전, 저서가 주장하던 것이었고, <창세기의 족보>는 그 잘못된 학설과 주창자들을 일일이 적시했다. ‘노아방주 건조기간 70~80년’은 이제 ‘오래된 상식’처럼 되었다.
‘기이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건 이 대목에서다. ‘창세기 5장 족보’가 이처럼 익숙해졌으나 그 내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책과 시리즈의 이름은 들은 기억이 있어도 그 책이 ‘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아는 이를 찾기는 더 어렵다. 책은 수십만 권이 팔려나갔고, 그 컨텐츠는 여기저기 소비되고 유통되고 있으나, 책과 내용이 연결되지 못한다. 조각조각의 진실만 알고 그 ‘출처(出處)’나 ‘근원(根源)’을 모르니, 이런 이들에게 근원되는 책은 잊혀지고 있고 저자는 기억되지 않고 있다.
근원과 출처는 왜 중요한가. ‘사실을 바로 알고 교훈을 얻었다면’ 이미 충분한가? 혹 그럴지라도 성경에서라면 많은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알고 보니 그렇더라’는 식으로는, 예컨대 ‘노아방주 건조기간’이 주는 주요한 시사점을 간과할 수 있다. 우선 성경 몇 군데만 찾아봐도 파악되는 사실이, 그 긴 시간 드러나지 않을 만큼 성경이 ‘봉인된 책’이라는 걸 깨닫을 기회를 잃게 된다. 나아가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거지?” 라는 의문을 던지지 못하게 된다.
마태복음 족보 신드롬도 그러하다. “낳고,낳고,낳고”가 여기저기서 흥얼거려질 만큼 알려졌지만, ‘어느 시대, 누가, 어떤 이유’로 족보에서 제외됐는지 “유구한 역사 속 세계 최초”로 왜 이제서야 정리되었는지 ‘시대성’을 탐색하기 어렵다. 마치 2000년 전 마태가 처음 기록할 때부터 그렇게 이해되어 왔던 것처럼 강단에서, 인터넷에서 유통되고 있으니, 누가 이에 주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측면에서라면 이때로, 내게로 ‘새롭게 알려진 놀라운 일들’이 드러내는 특별한 구속경륜이 도리어 침식(侵蝕)당하고 사장(死藏)되어가고 있다고 볼 여지마저 있는 셈이다.
창세기 5장 족보 이야기는 얼마나 두루 알려졌는지, 이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 속 최초’를 ‘입증’해보여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한 인터넷 자료를 원전(原典)으로 삼은 이들에게 전후좌우를 설명하기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구속사 시리즈>와 제목도, 표지도 비슷한 어떤 시리즈물은 최근 주요 신문사 광고에 등장해 버젓이 ‘유사 서적 주의’라는 적반하장의 문구까지 달았다.
학문에도 흐름과 역사가 있다. 학문의 사조(思潮)는 전쟁, 발견·발명과 같은 큰 사건과 함께 변화하곤 했다. 민주주의 이론, 경제 이론 같은 것도 이런 상황에 맞물려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된다. 저서는 ‘시대성’이란 좌표를 떠나서는 절대로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으며, 그 시대성은 저자에게 압축되어 있다.
예언서가 회개를 촉구하고, 경계하게 하며 소망을 준다고 해서 교훈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의 예언이 같을 수 없는 것은 시대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고, 그 차이는 ‘저자’의 이름이 가장 크게 드러낸다. 선지자 각각의 이름이 각자의 시대와 상황을 대변하며, 각자에게 나타난 구속사의 경륜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성경 속 족보와 이름이 갖는 또 다른 중요성이라고 <구속사 시리즈>는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말씀의 전달자였을 뿐 아니라, 그 하나하나 인생이 구속 경륜의 산물들이다. 성경 속 책들이 상당 부분 저자의 이름을 딴 것이, 그 개인과 시대에 역사한 구속 경륜까지 깨달으라고 그렇게 된 것은 아닐런지. 마태,마가,누가복음이 공관복음이라 하여 내용과 교훈이 정말 같은가? 다니엘서를 대제국의 변천사와 맞물려 보지 않고 이해할 방법이 있던가? 중국 고사만 해도 그 시대와 배경과 주인공과 출처가 소개된다.
그러므로 ▲광야노정 장막 친 42곳에 담긴 성경적 의미 ▲시각화된 모세 장막성전과 이에 담긴 구속사 ▲대제사장의 예복에 담긴 구속경륜 등이 마치, 예전부터, 늘, 그렇게 누구나에게 이해되었던 듯 유튜브와 인터넷에서 설명되어지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새롭고 특별하게’ 드러난 구속 경륜을 가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성경에 관하여 잘못된 지식과 이해가 바로 잡히는 것은 바로 <구속사 시리즈>의 저자가 바라던 일이고 책을 저술하게 된 주요 목적일 것이다. 나아가 더 근본적인 목표가 있다면 책의 출간에 담긴 구속 경륜까지 충분히 전달되어 그 시대적 역할을 다하는 일일 것이다. “유구한 역사 속 세계 최초” 라벨을 달아 놓은 것이 그저 자랑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성경의 깊은 역사 속에 잠겨 있던 구속 경륜이 이제, 어떻게 드러났는지 소리쳐 알려주려 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럴진대 더 이상 저서의 역사성은 몰각(沒却)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려면 저자가 더욱 드러나고 주목받아야 한다.
이 저자의 ‘저작권(著作權)’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존중받지 못했다. 교계와 학계의 풍토는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현대(現代) 사회가 이런 상황을 면하라고 마련해 둔 ‘기본 장치’가 가동돼야 한다. <구속사 시리즈> 저자의 동역자·제자인 우리 모두가 자성하고, 안타까움과 경각심을 느껴야 할 때이다. 역사성의 상실로, ‘지금 이때에 마땅한’ 교훈이 희미해지고 있다. ‘족보 속 구속사의 경륜’의 근원은 외면하고, 옛날과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거나 생각함 없이, ‘낳고,낳고,낳고’만 남겨지는 일이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