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십자가는 하나님의 생각과 행위를 보여 줍니다
세 십자가는 하나님의 생각과
행위를 보여 줍니다
눅 23:32-43, 벧전 1:18-19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생의 보람 속에 눈 뜨고, 말하고, 귀로 듣고,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와 민족, 자신과 가족을 위해 모이기에 힘쓰고, 간절함과 안타까움으로 합심기도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모이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헤어지면 영광이 사라지는 역사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군을 진멸시킨 것도 미스바에 모여 기도했을 때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성경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반대하던 동복(同腹) 동생들도(요 7:5-10) 예수님 부활하신 뒤 120문도와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때 오순절 성령의 불이 강같이 쏟아졌죠. 우리는 모여야 합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봅니다. 모이지 않는 개인과 사업체는 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행위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 나오고 집에 있는 것입니다. 아는 척하고 교만하기 때문에 안 모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 자신과 자식들이 복 받는 길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원수같이 여기고, 세상보다 가치 없게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세 십자가는 세 개의 인간관을 나타냅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운데 달리시고 좌우편에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마 27:38, 눅 23:33) 세 십자가는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세 개의 인간관, 인생관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르고, 좌편이 다르고, 우편이 다릅니다. 무시무시한 형틀에 달려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도 고래고래 소리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좌편 강도를 보십시오. 창조주,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냉소하고 원망합니다. ‘될대로 돼라’ 하는 자포자기입니다. 그에게는 설 땅이 없습니다. 가는 길도 없고, 동서남북의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우편 강도는 다릅니다. 냉소주의자를 꾸짖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악착같이 매달렸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천국을 허락받았습니다(눅 23:43). 천국을 허락받는 것은 죽을 병에서 낫는 것보다 백배의 축복입니다. 가난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천 배의 부자가 된 것보다 더 가치 있습니다. 좋은 차 타고, 부부간 금슬 좋게 살고, 자식들이 잘 되는 것보다 만 배 이상 더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전체 성도의 영혼을 걸머지고 “하나님, 오늘도 천국 가는 길에 장애가 없도록 믿음으로 걷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축복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성도의 신앙고백이 있다면 아침에나 밤에나 오직 ‘천국’입니다.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삶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회개하고 천국 가는 길을 허락받은 우편 강도
1892년 우리나라로 파송된 선교사 윌리엄 스왈론 목사님은 ‘깡패 목사’로 유명한 김일두 목사님을 회개시킨 분입니다. 한국 이름은 ‘소안론’이죠. 우리나라에 와보니 백성들이 너무나 가난하고 고생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불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위로와 소망을 주고, 하나님의 친 아들딸로 만들어 주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작사한 찬송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이’입니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찬송가 545장 2절)
신앙의 궤도는 ‘하늘 가는 밝은 길’에 올라서는 일입니다. 영화 ‘E.T’를 보면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빛 가운데로 날아갑니다. 제가 어릴 때 읽은 책에는 사람이 대포알에 실려 하늘을 날아갔습니다. 그때는 ‘설마’ 했는데 이제는 로켓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도는 땅의 일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죽하면 골로세서 3:1에 ‘위에 것을 찾으라’고 하셨겠습니까. 스데반은 순교할 때 하늘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땅을 내려다보고 근심할 것이 아니라,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모든 죄악을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삶이 새롭게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면 그대로 반드시 열매 맺을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생을 바라보는 소망의 눈이 반짝반짝해야 합니다. 정신 못 차리면 눈동자가 흐립니다. 잃어버린 인류를 찾아오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피의 권세가 대단합니다. 죄악이 녹습니다. 얼음을 따뜻한 데 놓으면 녹아버리듯, 십자가 피만 의지하고 살면 죄가 들어가자마자 다 녹아내립니다. 죄가 자기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편 강도에게 하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직접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천하에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우리 인생들은 하늘나라 밝은 길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올라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모두 걸음마다 피곤하고 허우적거리는 생활에서 벗어나 믿음의 날개를 펴고 하늘을 향해 훨훨 올라가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저는 외국에 가면 꼭 무덤을 찾아갑니다. 사람들이 ‘좋은데 놔두고 하필 공동묘지를 가느냐’고 합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공동묘지에 갔더니 비석에 ‘언제 태어나 언제 떠났다’고 쓰는 대신 ‘언제 태어나 언제 올라갔다’고 쓴 것을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올라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올라가는 인생관입니다. 왜 툭하면 ‘아파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고 합니까. 왜 땅속에 내려가려고 기를 씁니까. 평강 성도들은 죽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믿음의 날개로 늘 올라가는 인생관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얼마나 좋습니까. 찬송가 394장(‘주를 앙모하는 자’)만 불러도 이렇게 흥겹고 삶에 보람을 느끼는데, 그 나라 가면 얼마나 기쁠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양말이 필요합니까. 내복이 필요합니까. 부엌 살림살이가 필요합니까. TV, 라디오도 필요 없습니다. 온통 청아한 음악 소리입니다. 우리를 섬기는 천군천사가 천천 만만입니다. 가는 곳마다 다이아몬드, 금길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이 빛이 되시니 불을 켜고 끌 필요가 없습니다. 피곤치 않은 세계입니다. 이 땅에서는 매일 세상 일에 얽매여 얼마나 고달픕니까. 남편 걱정, 아내 걱정, 자식 걱정, 등록금 걱정, 취직 걱정에 쉴 틈이 없습니다. 세상 생각으로 ‘그 나라 가면 잠도 안 자냐?’고 하지만, 그 나라는 밤이 없고 고단한 것이 없는 세계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좌편 강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는 심판입니다.
멸망 받을 강도는 한없이 내려가는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강도는 한없이 올라가는 인생관입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는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너와 나는 죽어서 마땅하지만 가운데 계신 분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느냐?”. 위대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부탁했습니다. 그의 영혼이 올라가고 그 육신이 올라가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올라가는 인생은 나사로같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삶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의지한 강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심판 대신 용서를, 지옥 대신 낙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보십시오.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다’고 크게 소리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회개 안 하면 촛대를 옮기십니다(계 2:5). 무서운 말씀입니다. 촛대를 옮기면 캄캄합니다. 아무리 벌어도 터진 주머니로 다 새어 나갑니다.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설교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였습니다(막 1:15).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눅 5:32)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생각을 돌이킵니다. 사도 바울은 회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요소라고 말씀했습니다.(딤전 1:15, 고후 7:10) 구원을 취소할 수 있는 여부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하십니다. 믿지 않으면 구원을 취소하십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서 회개는 가장 높은 고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구속(救贖)을 구속(拘束)으로 오해해 도망쳤지만,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구약에서 회개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요나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 대신 자기 생각을 따라 오늘날의 스페인인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래 뱃속에서 회개했습니다. 지옥 같은 스올에서 회개할 때 고래가 그를 니느웨에 가도록 토해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시는대로 해드리는 것입니다. 회개한 뒤 하나님이 다시 니느웨로 그를 보내신 것을 보십시오. 요나의 회개는 두 개의 ‘포기 사건’입니다. 첫째로 자기 영토를, 둘째로 자기 방향을 포기한 것입니다. 포기가 없으면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자기 영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고래 뱃속에서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자기 영토를 포기하자 고래 뱃속이 하나님의 품 안이 됐습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는 근심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유스럽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방향이 속박(束縛)과 구속(拘束)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영토를 찾으러 갔다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비로소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 맞췄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영토에서 오만짓 다하며 살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途上)에서 하나님의 빛으로 생포돼 비로소 ‘아아, 내 영토가 가짜였구나. 임시변통의 영토였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지식의 영토, 경험의 영토, 유대교의 영토를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영토를 발견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한 치도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 진정으로 회개했습니까? 회개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안 빠지면 가정이 잘 되거든요. 자기 가족 다 걸머지고 ‘하나님, 내 영토 포기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토 속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영토! 은혜의 영토! 예수님같이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 자기 영토를 다 아버지께 소속시키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면케 하옵소서” 할 때는 답하지 않으시던 하나님이 이 말씀을 들으시고 천군천사를 동원해 예수님을 수종들게 하신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조차도 영토와 방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셨으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방향은 예수님이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하겠습니까. 말씀의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으로 죄 사하면 되지 왜 처참하게 죽어야 합니까’ 하셨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피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지혜에 속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사탄은 예수님만 죽이면 끝인 줄 알았지만, 그 핏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담겨, 가는 곳마다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있습니다. 십자가 피가 믿음으로 우리 몸에 닿기만 하면 과거에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가 다 없어집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겉으로만 회개하니 ‘내 죄가 진짜 사해졌나?’ 궁금해하고, 1년 뒤 부흥회 가서 또 회개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왜 죄 보따리 다 내놓았다가 도로 가져가느냐’ 하십니다. 좌편 강도는 자기 영토를 만들었습니다. 자기 방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강도는 자기 영토와 방향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참 멋있는 장면입니다.
세 개의 십자가에는 구원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 드러납니다.
가운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볼 때마다 기쁘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십자가가 부딪치는 곳마다 나의 모든 것이 깨어지고, 대신 영생이 구원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좌편 강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관심했습니다. 그에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지옥밖에 없습니다. 또, 구원받은 우편 강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비록 큰 죄를 지었지만 죽음에 이르는 최후 순간에 회개할 때 예수님 의지하고 믿고 그의 손목을 붙잡을 때 주께서 책임지고 낙원에 데려가시는 그 광경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 준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출 필요 없습니다. 죄지었으면 지은 대로 다 아뢰면 됩니다. 말씀 한마디에 죄사함 받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내 말로 네 죄 사했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은혜받은 우리는 모두 교회 각 기관에서 일해야 합니다. 일 안 하면 지금은 좋은 것 같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겨우 받게 됩니다. 진짜 교인은 여선교회, 남선교회, 청년회 등 각자의 몫을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습니다. 그 나라 갈 때까지 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형 받는 순간까지 일했습니다. 감옥에서도 일했습니다. 주인의 것을 훔치다 감옥에 들어온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낳은 아들’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바울처럼은 못한다 할지라도 성가대에서 찬양하든, 교회 봉사를 하든, 헌금을 하든 일하시기 바랍니다. 나이 든 권사님만 마르다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은 왜 일하지 않습니까. 1년이면 1년, 기간을 정하고 ‘나 1년만 하나님 앞에 헌신, 봉사하기로 서원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식당에서 일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래, 네가 내 발과 손이 되어주는구나’ 하시며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전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쁘다고 하지 마십시오. 몇 년 뒤 ‘그때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데 이제 늙고 아파 일을 못하는구나’ 후회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은 진실과 충신의 이름을 가지고, 면류관을 쓰고, 예수님의 다리가 되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 하면 피곤한 것 같지만 이내 회복시켜 주시고, 감사할 조건과 기회를 자꾸 주십니다. 내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깁니다. 저는 그분들 가정에 예수님 이름으로 자손만대에 축복이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요한계시록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자녀가 일류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다니면 뭐합니까.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낳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면하고 믿지 않는 자녀를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예레미야 48:10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여기서 ‘자기 칼’은 말씀입니다. 내 남편과 아내의 영토, 내 자식의 영토를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방향을 하나님께로 바꾸겠다고 기도하는데 잘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집 한 채 사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러나 집 한 채에 비해 하나님의 영토는 얼마나 광대합니까. 산발랏, 도비야 같은 자가 되어 지금 교회에서 일할 때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기회 놓치지 마십시오. 몇십 년 동안 안 풀리고 막혔던 것들이 반드시 터지고 빛의 서광(曙光)이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에 비추며, 지지 않는 의의 태양이 머물러 있을 줄로 믿습니다.
2005년 3월 17일 목요구국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2020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