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제일교회  ›  평강미디어  ›  평강라이프  ›  참평안
참평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창간 40주년 기념호 수록 설교)

2020.10.28 11:16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요한복음 14:27, 로마서 8:6,13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인간은 마음이 편치 못하면 위축되고, 기분이 좋지 않고, 만사가 귀찮고,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요 14:27)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일생을 통해 받지 못한 평안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뜨겁게 기도하며 마음속에 그 말씀을 모셔서, 그 나라 가서 주를 뵐 때까지 평안이 온 가정에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4:27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를 사흘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뼈를 깎듯 가슴이 아픈 유언의 말씀입니다. 또 다른 본문인 로마서 8:6은 사도 바울이 성령 충만해서 한 말씀입니다. 육신의 생각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 땅에서 생존 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인류 중에 근심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육신의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먼저’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즉 먼저 말씀을 듣고,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먼저 믿음으로 굳게 결심하는 삶을 산다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내가 받아서 내 아버지,어머니를 평안케 해드리고, 남편은 아내와, 아내는 남편과 일심동체가 되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좇아가는 삶(창 12:4)을 살면 아브라함의 복이 여러분 가정에 반드시 임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靈)의 생각이 평안’이라 하셨습니다. 영의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육신을 가진 인간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육(肉)의 생각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 믿음을 갖고 성령님의 생각으로 살면, 영적으로 편안하고 육신의 모든 생활도 평안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먼저 나를 생각하느냐? 알겠다. 너 하는 일에 영육 간 복을 주겠다’ 하십니다. 육신의 생활도 여유 있어지고, 사업을 해도 밑지지 않고 남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영의 생각은 믿음 없는 것을 믿음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 배우자, 자식을 사랑하듯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는 그다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육신의 부모를 먼저 생각하니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하나님이구나. 네 마음대로 해라’ 하십니다.

우리가 영의 생각을 해야 하나님께서 ‘네 힘으로 안 되지? 너는 피조물이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나에게 부탁하는구나’ 하시고 모든 것을 형통케 해주십니다(잠 16:3).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시 55:22). 맡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니 마음만 천근만근 무겁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육의 생각까지 책임지고 맡아주십니다.

기독교는 평안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근심과 걱정은 다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면 나에게서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40년, 50년 믿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하면서도 아직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세요. 그리스도인에게 평안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쥐뿔도 없는 것입니다. 근심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근심이 있으면 ‘이거 어떻게 사나’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요일 3:8). 온전한 사랑은 근심, 두려움, 염려를 내쫓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 편안합니까? 진정 편안합니까? 각자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지 말고 대답해 보세요. 우리 중심을 아시는 분입니다. ‘네가 뭘 편안하냐. 믿음도 없고, 나에게 맡기지도 않고, 네가 좌지우지하지 않느냐’ 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악인입니까?

평안이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인을 찾아야죠.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가나 들어오나(시 121:8) 복을 받는 출입의 복을 받습니다(신 28:6). 복받은 사람은 편안합니다. 반면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사 48:22, 57:21). 도둑질하고, 사기 치고, 오만가지 죄를 짓는 사람만 악인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배드릴 때 정성 다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죄짓는 사람, 즉 악인입니다. 하나님은 폭풍과 회리 바람으로 악인의 머리를 친다고 하셨습니다(렘 23:19, 30:23). 폭풍 불면 지붕까지 다 날아갑니다. 지붕이 날아간다는 것은 모든 삶의 머리가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날아갔는데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악인은 칼에 붙인다고 하셨습니다(렘 25:31). 그러니 죄짓는 사람은 결코 마음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의 마음이 얼마나 두근두근했습니까(창 3:3-7). 죄짓고 나니 벌거벗었음을 알았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아랫도리를 가렸지만 해가 뜨니 바싹 말라 부서졌습니다. 다시 부끄러워져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아담의 처소성(處所性)을 물으신 것입니다. 숨바꼭질하듯 위치를 몰라 물으신 것이 아니라 ‘지금 네 상태가 어떤 처지에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은 사실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있어야 할 그 장소에 ‘사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모가 아무리 말해도 자식이 듣지 않으면 “야 이 녀석아 네가 사람 새끼냐”고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세계에서는 아담이 여전히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사람으로 보셨다면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사야 60, 62, 65장과 요한계시록 2장에 하나님은 이기는 자에게는 ‘새 이름’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다른 이름으로 칭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죄지은 아담에게는 평안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 친근하고 자비롭고 인자하고 사랑스런 음성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던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별하게 됐으니 너무너무 불쌍하고, 측은하셨던 것입니다.  ‘저것들이 불순종하고 죄지었으니 이제 어떻게 살꼬’ 하고 걱정하신 것입니다. 창조하신 사람을 잃게 되셨으니 가슴이 미어터질 정도로 아프셨습니다. 사람이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도 짓기 전에 도둑이 채갔다면 가족 전체가 얼마나 서럽고 분하겠습니까. 망나니 노릇 하는 자식에게 어머니가 ‘이 녀석아 내가 너 낳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잠 못 자고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길렀는데, 사람 될 줄 알았더니 네가 왜 모양이냐. 짐승만도 못한 녀석아. 온 집안이 그렇게 기도했는데 네가 왜 이렇게 됐느냐’ 하며 막 우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볼 때 분명히 자기 아들입니다. 그러나 뜻으로 볼 때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네가 사람 새끼냐’ 하고 한탄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깊은 말씀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친근하고 인자한 음성이 죄지은 아담에게는 무서운 질책의 우렛소리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숨어 있습니다”(창 3:10)라고 답했습니다. 자신을 가리고 숨기려는 심리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 하셨습니다. 마귀 사탄의 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마음이 아프고, 책망받은 아담과 하와는 평안이 없어진 것입니다.


평안이 없다는 것은 사명을 등졌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사람 중에 사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등지면 평안이 없어집니다. 뭔지 모르게 동서남북이 다 답답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의 교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방 땅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외면하고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배 밑창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풍랑을 만나 다 깨어지게 됐습니다. 선원들이 짐까지 버려도 소용이 없으니 배 밑창에 있던 요나를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십시오. 요나를 바다에 집어던지자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죄가 있으면 요동칩니다. 죄가 빠져나가야 편안하고 사업도 잘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까지 살면서 죄책감이 없습니까. 이 말씀 듣는 순간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명’은 마음에 들면 순종하고, 마음에 안 들면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든지 살든지, 먹든지 못 먹든지 사명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명을 붙잡고 있으면 편안합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대로 순종하면 더욱더 편안하고 평강해집니다
(빌 4:6-7). 사명은 기분과 조건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에게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구역을 맡았든지, 집사, 권사, 장로를 맡았든지 그 일을 해야 편안한 것입니다. 사명 맡은 자가 불이행해 보십시오. 일이 되지 않습니다. 사명대로 살려 할 때 첫째 마음이 편안하고, 두 번째 기쁨이 샘솟습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가정은 축복된 가정이 됩니다.

성화_문재연 성도


사명을 저버리고 ‘멀찍이’ 따라간 베드로

베드로를 보세요.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로 로마 병정들에게 붙잡혀갈 때 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포승줄에 묶이고 채찍을 맞으실 때 베드로가 앞장서서 말렸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분이 하나님이야. 오신다는 그리스도 메시아야. 창세기 1장부터 모든 율법이 이분을 가리킨 거야. 이분은 영원한 생명이야. 그런데 이분을 잡아? 당신들 정신 있어?” 했어야 할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옥에 갇혀도 같이 가고, 주님 죽는 길에도 같이 가고, 뜻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자기도 죽을까 봐 ‘멀찍이’ 거리를 두고 쫓아갔습니다(마 26:58, 막 14:54, 눅 22:54, 요 18:15).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네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가까이 좇지 못하고 상거(相距)를 두고 멀찍이 따라와?’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추운 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입으시고, 며칠간 음식도 제대로 드시지 못한 예수님이 심문 받으실 때, 베드로는 춥다고 불을 쬐다가 ‘이 자도 나사렛당이다’ 라는 말을 듣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저주까지 하며 아니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죠. 닭이 울었습니다. 그제서야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누가복음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성도 여러분. 영원히 잊지 마세요. 내가 받은 사명대로 행하지 않으면 주를 멀찍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집안이 잘 되겠습니까. 예수 모르는 생활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몸을 도사렸습니다. 눈치를 봤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마음이 편안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생활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가지 말라는 길을 가잖아요. 자기 양심에 ‘이건 죄인데’ 하고 알면서도 가잖아요. 베드로가 예수 모른다고 한 것과, 우리가 알고도 죄짓는 것은 똑같은 죄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새벽에 닭이 꼬꼬댁하고 울 때마다 놀라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목사님, 성경에 제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신림동 일석교회 시절 목회할 때입니다. 차가 없으니 여기저기 걸어서 심방을 다니다가 다리가 아파 어느 골목 언덕에서 쉬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이 심방을 다니던 나이 50이 넘은 집사님이 성경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심방을 가다가도 성경을 열심히 읽는구나’ 하고 대견해서 들여다보니 마태복음 9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여기 내 이름이 있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거기 왜 집사님 이름이 있습니까?” 하니 “여기 ‘죄인’이라고 바로 내 이름이 쓰여있잖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머리 숙여 마음 중심으로 그 집사님을 존경했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그 후 그분이 하던 장사가 잘 돼서 기와집을 사고 과수원도 사는 것을 봤습니다. 그분은 제가 설교한 것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3주 전 요나에 대해 설교하면 자기가 요나라고 하고, 베드로를 설교하면 자기가 베드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베드로, 사명에 순종하는 요나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우리 평강교회 성도 모두는 성경을 보고, 깨닫고, 믿고, 성경대로 살려고 할 때 자손만대에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증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서 떠나면 안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실 때 평안의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위협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기드온 300용사처럼 물리치십시오

결론을 맺겠습니다. 평안이 왜 없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평안이 없는 이유는 믿음 없이 믿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믿습니다. 그런데 마음 뜨겁게 말씀을 그대로 모시고 사는, 생활로서의 믿음은 없습니다. 성경을 들고 교회 나오죠. 그러나 성경을 읽고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생깁니까. 로마서 10:17에 믿음은 들음으로 난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에 말씀을 듣고, 읽고, 그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참 평안을 누리면서 믿음이 있는 생활, 떡 반죽 그릇마다 가득가득 채워주는 생활, ‘야, 문 좁다. 크게 내라’ 할 정도로 문을 크게 내서 축복의 바람이 들어오는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바람이 들어오니 부모님, 아내, 자식 건강하고, 자신도 건강하고, 모든 생활이 감사입니다. 찬송이 나오고 기도가 나옵니다. 그 집은 졸지 못합니다. 늘 깨어 있습니다. 예비하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신앙이 있습니다(마 24:42, 마 25장).

사사(士師) 시대에 미디안이 메뚜기떼처럼 이스라엘에 몰려왔습니다. 13만 5천 명, 현재 부대 편성으로는 13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이스라엘을 포위했습니다. 사사 기드온이 두려워 ‘정말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일하시는 분인가’ 확인하기 위해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양털 밖은 바싹 마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음날에는 반대로 ‘양털 밖에만 이슬이 내리고, 양털은 마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대로 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정말 믿게 된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기드온아, 미디안과 싸우기 전에 부탁이 있다. 첫째,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백성들이 선지자 기드온을 신뢰해야 하니 두 번째는 기드온을 위하여, 이 두 가지만 말하라” 하셨습니다. 3만 명을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겨서 오른손에 횃불과 항아리를 들고 있다가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들게 하니 동서남북 천지가 환해졌습니다.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의 대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놀라 자기들끼리 칼로 서로 죽여 12만 명이 몰살했습니다. 나머지 1만 5천은 기드온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섬멸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여러분 사업의 악의 세력, 가정의 악의 세력, 몸을 괴롭히는 세균을 비롯한 모든 악의 세력을 다 기드온 용사같이 박멸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그 후 2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린 것처럼, 평안의 역사가 개인과 직장과 가정에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평강교회입니다. 이름대로 되는 거예요. 왜 안 됩니까. 믿음이 와야 평안이 옵니다. 평안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 때 인생의 승리와 성공이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가정 가정마다 평강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 권력, 물질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어 참평안을 얻으십시오

예수님 제자 중 도마만은 예수님 부활을 못 믿고 8일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주님이 못 박히고 찔리셨던 옆구리와 양손, 양발을 만져보기 전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도마가 눈물 흘리며 용서해달라고 하자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 나를 만져보고 믿느냐?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축복이 있다” 하셨습니다(요 20:18-29). 우리는 도마처럼 예수님을 만져보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성경은 그림의 떡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우리 평강교회 성도 전체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 무엇을 바라든지 실체로 이뤄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의 불안은 믿음이 없고, 성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집중하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 마음에 평강을 잊어버릴까 봐 성령의 역사로 예수께서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 믿으면 안전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합니다(잠 29:25).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갈 6:14). 그의 삶은 늘 천국에 입성하는 삶이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 의의 면류관을 가지고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믿었습니다(딤후 4:7-8). 우리 평강교회 성도들도 사람, 권력, 물질 믿지 말고 하나님만 믿어서, 남이 갖지 못한 평안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하는 일이 은혜 가운데 성공적으로 잘 되고,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아들딸, 손주가 다 예수님 모시고 그 나라 입성할 때까지 평강의 동산, 평안의 동산, 승리의 동산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안한 사람은 병 걸리지 않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천국의 생명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본래 죽지 않게 창조됐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전 3:11). 천국의 종소리를 들으며 영생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갑시다. 마지막까지 산 사람은 순간적으로 영육 간에 변화됩니다(빌 3:20-21, 살전 4:13, 고전 15:51). 우리는 죽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살아서 믿어 영육 간 변화 받을 것을 소망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리겠습니다.

2009.3.11 수요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2020 10월호

원문 보기 ›

댓글 0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글쓰기
번호 제목 작성일
2970 영적인 지도자의 규칙 – 고린도전서 4:1-2, 로마서 15:1-2 2026.09.22
2969 ‘은혜 언약의 표징, 내가 너희 중에 거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 2026 여주 목회자 구속사 대성회 2026.09.22
2968 “한 사람 뒤에 백 명, 천 명, 한 나라가 서 있어요” 다시 펼친 영어책, 열방을 맞이하는 인사가 되다 2026.09.22
2967 ‘이 연합, 얼마나 아름다운가!’ – 2대 교구 남녀선교회 연합 구갓탤 뒷얘기 2026.09.22
2966 “40년의 은혜, 새로운 도약” 40년의 역사와 다음 세대를 향한 새로운 출발 2026.09.22
2965 기쁜 마음으로 잔치를 합시다 – 요한복음 4:24-36 2026.09.22
2964 영적인 지도자의 규칙 – 고린도전서 4:1-2, 로마서 15:1-2 2026.09.22
2963 ‘은혜 언약의 표징, 내가 너희 중에 거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 2026 여주 목회자 구속사 대성회 2026.09.22
2962 “한 사람 뒤에 백 명, 천 명, 한 나라가 서 있어요” 다시 펼친 영어책, 열방을 맞이하는 인사가 되다 2026.09.22
2961 ‘이 연합, 얼마나 아름다운가!’ – 2대 교구 남녀선교회 연합 구갓탤 뒷얘기 2026.09.22
2960 “40년의 은혜, 새로운 도약” 40년의 역사와 다음 세대를 향한 새로운 출발 2026.09.22
2959 기쁜 마음으로 잔치를 합시다 – 요한복음 4:24-36 2026.09.22
2958 마라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엘림은 보이지 않는다. 이집트 구속사 세미나 참관기(1) 2026.09.22
2957 누구라도 쉬기 원하는 시간, 고된 봉사를 자원한 평강의 어른들 남선교회 ‘오직봉사팀’ 토요 봉사 체험기 2026.09.22
2956 추석에 관한 잔소리, 금(金)소리 2026.09.22
2955 The Rules for Spiritual Leaders – 1 Corinthians 4:1-2; Romans 15:1-2 2026.09.22
2954 Foreword 2026.09.22
2953 참된 광복 ‘나’로부터의 개혁이 있어야 2026.09.01
2952 ‘열방을 향하여 구속 경륜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의와 영광의 빛을 발하자’ 2026 하계 대성회 2026.09.01
2951 성막 화첩의 인기에 힘입어 번역 출간된「신묘한 영광의 비밀, 성막과 언약궤」 구속사 시리즈 제9권 영문판·일어판 출판 감사예배 2026.09.01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