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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망(存亡) 가르는 현장마다 – 역사(歷史)를 일깨우는 공간

2020.09.30 20:30

국가의 존망(存亡)
가르는 현장마다

역사(歷史)를 일깨우는 공간

「오색 여호와이레 수양관」 현관 입구는 ‘역사(歷史)’를 일깨우는 공간이다. 입구 왼편 벽에 걸린 17개의 시계는 6·25 해외 참전국 16개국에 전장(戰場) 대한민국을 포함해 ‘17개’ 나라가 공산 세계 연합에 맞섰음을 상기시켜준다.
그 아래 <유엔군의 북진(5.23~6.15)> 지도는 빽빽이 기록된 양측 단위부대 부호를 통해 이 시기 전세(戰勢)를 상세히 알려 주고 있다. 이 지도는 몇 해 전에야 찾아낸 일본 사료(史料)로, 1950년 겨울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내려왔다가 이듬해 다시 북진했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우선 6·25 이듬해인 1951년 ‘5월 23일의 전선’은 건군 이래 최대의 참패라는 ‘현리 전투’* 직후에 형성된 라인이다. 동쪽으로는 주문진 바로 아래 전선이 형성돼 있고 오대산과 설악산 일대에 중공군이 배치돼 있다.

‘5월 30일의 전선’은 아군이 간성(杆城)까지 진격한 가운데 남쪽 설악산을 중심으로 빨간 원이 있고 적군의 수가 ‘6만(万)’이라고 적혀있다. ‘6월 15일의 전선’은 아군이 동해안으로 금강산 동쪽까지 점령한 상태다. 수만의 중공군이 괴멸됐음을 의미한다. 전선 위의 고성(高城)은 지금 북한 땅 고성이다.

* 현리 전투: 1951년 5월 16일-5월 20일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과 중국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인제에 주둔하던 국군 제3군단이 중국군에 퇴로가 끊기고 포위되자 평창의 하진부리(下珍富里)까지 무력하게 퇴각했고, 그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한국전쟁 기간에 나타난 최악의 패전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제3군단이 해체되고 육군본부가 작전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두산백과)

 

1951년 5월 오색천의 결정적 전투

지도는 말은 없지만, 많은 풀이를 해주고 있다. 우선 지도의 숫자 ‘6만’은 다른 자료들의 추정치보다 월등히 많다. 국방 군사연구소가 출간한 「한국전쟁」은 1개 연대로 추정해 놓았다. “이 무렵 항공 관측과 수색 정찰 보고에 의하면 적은, ~ 방어 거점을 편성한 후 철수하는 중공군과 인민군을 엄호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제11사단은 설악산 일대를, 수도사단은 간성을, 제3사단 18연대는 설악산 남쪽의 가라피리-마산리 일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산리’는 여호와이레 수양관이 위치한 곳의 옛 이름이고, 동쪽으로 이웃한 마을 이름은 지금도 가라피리(可羅皮里)이다.

마산리~가라피리에 걸쳐 오색천 양편 좁디좁은 계곡에 수만의 중공군이 대거 집결해 있고, 이를 섬멸하기 위해 투입된 국군 최정예 ‘백골부대’(18연대)가 혈투(血鬪)를 벌였을 때, 오색천이 몇날 며칠을 어떻게 피로 물들어 양양 남대천으로 흘러들었지를 상상해 보게 하는 사료(史料).  앞서 중공군은 오미재(강원도 인제군·오마치)에 숨어 있다가 현리에서 후퇴해온 국군 3군단을 기습해 국군에게 치욕적인 패퇴를 안긴 터. 뒤이어 이곳에서 또 다른 ‘매복’을 통해 국군 주력에 결정타를 가하려 했기에 중공군은 이곳에 6만이라는 병력을 배치했을 것이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18연대 3대대 소속 홍현달 옹(89세·예비역 중사)은 「참평안」과의 인터뷰에서 “추풍령에 도달해 보니, 아래로는 군단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며 지도상의 기록이 현실에 부합함을 증언했다. 홍현달 옹의 증언은 이 전투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전투를 마치고 양양으로 나갔더니 더 이상 적이 없었지. 속초를 거쳐 바로 화진포까지 올라갔어. 일단 화진포 전망대에 주(主) 저항선을 만들었고, 전초(前哨) 부대는 고성과 내금강을 오갔어. 휴전회담한다고 제지하지만 않았다면 더 올라갈 수 있었는데. 공산당들이 ‘전선을 그대로 두지 않으면 회담하지 않겠다’고 해 진격을 멈췄고 그사이 적 병력이 보강됐어. 그리고 전선이 고착된 거야. 너무나 아쉽지.”

 

국가의 존망 가르는 경계선에서

그해 5월 말 벌어진 오색천에서의 전투는 사실상 오늘날 동부 해안의 휴전선을 형성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화진포까지 내달릴 수 있도록 했던 승리. 18연대 소속으로 20대 초반의 ‘군인 박윤식’도 중대장으로 그때 그곳에 있었다. ‘유엔군 북진 지도’에 그려진 마지막 전선(6월 15일) 이후에도 18연대는 북진 전투를 이어갔고, 그는 사흘 뒤인 6월 18일 적진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주변 부대와의 공조에 문제가 생겨 내금강 일대로 추정되는 어느 계곡에서 적에게 포위당해 총격전 끝에 대퇴부 관통상을 입었다. 중공군과 인민군을 피해 넝쿨 바위 밑에 숨어 칡넝쿨로 허벅지를 쥐어 매고 사흘을 버틴 끝에 미 2사단 예하 제1기갑 사단에 의해 구조된다.

현대사의 피 뿌려진 비극의 현장마다 평강제일교회의 수양관이 세워졌음을 알고 있었더라도, 그 실상(實狀)에는 얼마나 근접했을지 이 지도는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이 전투를 포함해, 평강제일교회 설립자이자 구속사 시리즈 저자인 휘선(暉宣) 박윤식 목사가 ‘군인 박윤식’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그 현장들이, ‘국가의 존망(存亡)을 가르는’ 역사의 경계선들이었음도 새삼 헤아려 보게 한다.

그러나 그 현장을 좇는 일은 녹록지 않다. 박윤식 목사는 ‘군인 박윤식’의 개인사(個人史)를 단 한차례도 종합해 설명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항암 투병 중에도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를 집필하고 50년 목회 사역에 단 한차례도 거르지 않고 매주 ‘구국(救國) 은사 집회’를 열었던 그다. ‘전쟁의 참혹상’,  ‘공산당의 잔악상’,  ‘전몰 장병들의 희생과 핏값’에 대해 성도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정작  ‘그의 이야기’는 거의 들은 바가 없다. 그의 후학과 동료들이 그의 설교, 강의 등에 담긴 내용들을 조각처럼 모아 그의 경험들을 일부 짜맞추어온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휘선기념사업회의 연구를 바탕으로 「참평안」 특별호 제3권 「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2020년 7월 발간)를 통해 1차 종합 정리되었고, 이것은 그의 저서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제4권 「잊을 수 없는 6·25전쟁」에 새로운 이해를 더했다.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소개했던 자신에 관한 일들 ▲보병학교 ▲박정희와의 근무 ▲공비 토벌 ▲옹진반도, 개성지구 전투 ▲송호성 장군과의 대화 ▲백골부대 ▲김석원 장군에 의한 중대장 임명 ▲22연대 등은 그의 동선을 구성해 나가는 단초가 됐다. 이것들과 사료, 증언 등을 종합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47년 5월 17일 월남한 뒤 1948년 2월 통위부(統衛部, 국방부의 전신.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후 국방부가 되었다)에 설치된 ‘보병학교’에 입교했다. (이 학교는 동년 7월 1일에 폐교되고, 다음 해 7월 1일 육군본부 직할로 간부후보생의 양성 및 기성 장교의 보수교육을 목적으로 재설립되었다/두산백과) 그는 이후 박정희와 함께 일하게 된다.

“48년 6월 통위부에 가니 박정희 대통령이 거기 계셨다”(2013. 5. 12. 설교 중)  “그해 10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터지자,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반군 토벌전투사령관에 임명돼 광주로 날아왔다. 현장에  ‘통위부 작전 교육국 과장’ 박정희 소령을 대동했고, 함께 내려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백선엽 장군 자서전 「군과 나」 및 언론 인터뷰 등)  박정희는 이때 직속 부하였던 박윤식을 동행한 듯 보인다. (앞서 송호성-박윤식은 면식이 있었다. “당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배 장교들과 하사관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설명하곤 했는데, 어느 날 송호성 준장이 불러 내용을 듣더니 ‘요즘 공기가 심상치 않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여순반란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1948년 9월 말이었다”(2013. 5. 12. 설교 중). 송호성은 전쟁 발발 직후 남하하지 않고 북한군에 합류했다.)
박정희 소령은 그해 11월 숙군(肅軍)으로 군을 떠나지만, 박윤식은 현장에 남아 공비 토벌에 주력했다. “이북 출신이라고 토벌 현장마다 불러댔다”(2010. 5. 26 설교 중)고 했다. 제주를 비롯해 경북 영덕·안동·영양·대구, 경남 하동·산청, 강원 정선, 전남 구례·영광 등을 다녔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 대구 1,2폭동 사건, 제주도 4.3사건, 개성 옹진 전투, 그거 겪은 다음에 6·25를 만났습니다”

그는 개성에서 6·25를 맞았다. 앞서 38선 서부전선에 배치돼 옹진반도, 개성 토성·여현 등 38선 최접경 지역에서 전투를 치러왔다. “개성 북쪽 토성, 여현에서 군인의 한 사람으로 거기서 제가 6·25를 맞이했습니다” (2000.7.2. 설교 등) 그는 이미 이때 수도사단 18연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연대는 부산에서 창설돼 1946년 수도사단을 이루었고, 1951년 3사단에 편입된다. 창설 때부터 이북 출신들이 대거 지원해 주축을 이뤘다.)

 

6·25 전쟁 발발 후 국군 주력의 동선

개전 이후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제4권 「잊을 수 없는 6·25전쟁」 제4장의 흐름대로다. 수도 서울 함락 과정을 순차적으로 다룬 옹진지구 전투⇒개성-문산 지구 전투⇒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한강교 폭파와 이후 한강선 방어 전투 등은 당시 *국군 과반의 이동선이자, 그의 전투 동선이었다.
6·25 발발 후  ‘3일간’은, 서점에서 흔히 접하는 6·25 관련 서적이 기술하듯 그저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일패도지(一敗塗地), 연전연패(連戰連敗)로 규정할 일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는 당시 군의 부패상과 무능, 군 수뇌부의 지속적인 오판을 충분히 지적하면서도 더 자세히 보고 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진 전몰장병
(戰歿將兵)의 희생에 핏값을 되찾아 매겨놓았다.

“개전 초기, 적의 전차와 자주포를 멈추게 할 효과적인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소부대의 초급 지휘자(관)들 중에는 필사적인 육탄공격으로 적의 진입을 막다가 산화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38선 전역에서는 몇 명~십수 명으로 구성된 특공대 결사대 등이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의 활약과 희생으로 축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는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병력과 화력 면에서 절대 열세에 있었던 전선 상황도 부분적으로나마 만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급 지휘자(관)들이 몸으로 보여준 전투는 가히 희생적이고 결사적이었으며 나라를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한 위대한 구국적 행동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제4권 97쪽)

*국군 1사단, 5사단, 7사단, 수도사단, 2사단, 3사단, 기갑연대·포병학교 등 기타 증원부대

 

그 자신이 현장의 동행자이며 목격자인 전우(戰友)였기에 그 값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서점의 책’들은 한강변 이쪽저쪽 몰려든 국군을 지휘체계가 와해된 채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고 도망친 패잔병으로 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근현대사 시리즈는  ‘한강선 방어’에도 주목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놀랍게도 국군 주력부대들이 흩어진 지 불과 10시간 만에 3개 혼성 사단을 편성하여, 양화교-광진교상 한강 연변 24㎞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120쪽)

미 지상군의 투입을 위해 최대한의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 미군이 가능한 북쪽에서 전투를 전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 한강선을 지탱해야 하는 임무는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적의 남진을 지연시켰다고 평가했다.  이 중 ‘오류동 전투’는 서울의 서남과 경기도 부천을 걸쳐 지나는 현재의 지하철 7호선 라인 일대를 배경으로 한다.  “1950년 6월 29일~7월 3일 서울시 양천구·구로구와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지역인 구로구 오류동, 양천구 신월동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국군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격해 오는 북한군 제6사단을 4일 동안 저지하며 한강 방어선을 측방에서 엄호했다”<두산백과> . 

서부전선의 최초 병력 56,304명 가운데 43,518명이 ‘손실’(사망, 실종, 포로 등) 된 ‘첫 3일’은 결코 무의미한 사흘일 수 없었다. 이러한 일들이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유명한 어록(語錄)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오랫동안 크고 작은 전쟁터를 다 다녀보았는데, 한국군 같은 ‘독종’은 보지 못했다. 38선에서 밀리기 시작해서 한강, 수원, 대전, 낙동강 등 전선마다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한국군 패잔병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것 같은데, 항상 저희들끼리 새 부대를 편성하여 일선에 다시 보내달라! 무기를 달라!고 절규했다. 당시엔 탱크도 없어서 나가면 죽는 게 뻔한데. 유럽 전선에서 보면, 어느 나라에서든 패잔병은 도망쳐 초야에 흩어지면 그만이었다.”

 

호국의 의지와 희생으로 지킨 강토

“서울 남산 하얏트 호텔 자리에서 2천 명의 우리 군인이 희생됐습니다. 그때 무슨 조직이 있습니까. 갑자기 전쟁 났는데 그 2천 명 희생된 시체를 가지고 가야 될 거 아닙니까. 그 후로 하이야트 호텔이 섰어요. 뼈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속도로가 생기고 옛날 지형 다 뒤집어 엎어 놓았어요. 지금 여러분들 발전된 조국에서 현대식 건물을 보지만 저는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저 건물 밑에 우리 전우가 묻혀있을 텐데… 6·25 전쟁에서 유해를 찾지 못한 것이 134,000명입니다.” (2013.6.20  제7회 나라사랑 웅변대회에서 휘선 박윤식 목사 회고)

1950년 7월 6일~13일 충청북도 진천과 청주 일대에서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과 벌인 진천 전투의 의미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진천(鎭川) 전투에서 국군은 7월 13일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다. 그래서 대전으로 신속히 남하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국군과 유엔군이 금강과 소백산맥을 잇는 지역에서 방어선을 재편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고<두산백과>,  이 전투를 치른 다음부터는 “이제는 적과 싸울 만하다. 여기서 후퇴하면 적화될 뿐이고 우리가 설 땅은 없다”는 굳은 결의로 바뀌었다.<위키백과>

이 전투들을 거치고 그는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 있었다.  나라 영토의 10%에 거의 모든 병력이 집결한 곳. 모든 전투들은 ‘최후 전선의 붕괴’의 위기 속에 치러졌다. 18연대는 구룡포(초등학교)에서 정일권 참모총장으로부터 ‘옥쇄(玉碎)’를 명령받는다. “당시 안강, 기계는 ‘초급장교의 무덤’이라고 불리었는데 소위, 중위 등 초급장교들은 유서를 써놓고 싸우러 나섰습니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백골부대인 18연대에 ‘귀 연대의 역습으로 안강, 기계의 운명이 결정된다. 기필코 성공하라. 전원은 옥쇄를 각오하라’고 밀서를 보냈으며, 이에 연대장 임충식 대령은, …‘가자! 백골이 되기 위해서’”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제4권 141~142쪽)라고 호응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창인 8월 초, 그가 속해 있던 수도 사단의 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3사단장으로 임명됐는데, 그는 이때 3사단 22연대로 배속 받아 중대장을 맡은 듯 보인다. 낙동강 전투 당시 그의 계급은 ‘중위’였다고 2005년 설교 중 회고한 바 있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 인사 계통의 명령이 들쭉날쭉했다. 어떤 사람의 자리를 먼저 옮긴 뒤 부대장이 육본에 연락해 ‘내가 필요해 그 사람을 옮겨왔다’고 하면 양해가 되던 시절이었다. 명망 높았던 김석원 장군이 수도사단장이 되었을 때, 3사단장으로 옮겨갈 때 자발적으로 찾아간 장교, 장병들도 많았다” (백선엽)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맥아더 장군은 국군이 경북 영천을 탈환하지 못하면 인천 상륙에 성공해도 북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9월 12일 탈환 소식을 듣고 자신감을 가졌고, 인천상륙 작전은 일정대로 추진되었습니다”(근현대사 시리즈 165쪽)

 

 

 

38선 돌파와 북진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북진이 이뤄졌고, 그가 소속된 3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북진의 선봉을 맡게 된다. 1950년 10월 1일 3사단 예하 23연대는 공식적으로 38선을 첫 돌파했고, 산악 고지대를 맡은 22연대는 11월 말 압록강「혜산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10월 말부터 숨죽인 채 한반도에 진입하고 있음을 모르고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박윤식 중대장도 3사단 예하 다른 부대원들과 함께 12월  ‘흥남 철수’ 대열에 끼어야 했다. 18연대는 이 과정에서 3사단에 편성됐고, 박윤식 중대장은 다시 18연대로 복귀한 듯 보인다. 김석원 장군은 이미 9월에 3사단장에서 교체됐다.

‘3사단 18연대’는 최정예답게 철수와 동시에 새롭게 장비와 무장을 지급받아 바로 동부 산악 전선에 뛰어든다. 반격-재반격의 혈투가 이어진 가운데 이듬해 1951년 5월 현리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중공군에 밀려 “100리, 200리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후퇴”(1980. 10. 5 설교) 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연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 극적으로 적의 봉쇄를 뚫고 빠져나와 바로 설악산으로 진격, 오색천 일대에서 인민군 6만 명을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홍현달 옹, 참평안 인터뷰)

앞선 설명대로, 부상을 입은 그는 1951년 6월 후방으로 이송돼 일본에서 수술을 받았다. 당시 미군 중상자들은 일본으로 후송돼 수술받는 사례가 많았는데, 그가 부상 당시 미군에 구조된 것이 일본으로 후송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산 제5육군 병원을 거쳐 53년 6월까지 마산 제3 육군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은 뒤 전역하고, 서원(誓願)대로 목회에 투신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연락 오기를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면 어떠냐’ 했는데 ‘싫습니다. 하나님 앞에 목사 되기를 서원했습니다’ 했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 쉬는 죄 범한 적이 없습니다”  (1999. 7. 6 설교)

그러나 그의 전역증에 기재된 계급은 ‘이등중사’이고,  1957년 전역자로 되어있다. 군적(軍籍) 소실로 탈영 처리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자진 신고 기간에 군적을 재정리한 때문이다. 권영해 전 국방장관(육사 15기)은 최근 오색 여호와이레 수양관을 둘러본 뒤 그의 군적 문제에 관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런 일이 흔했습니다. 나중에 당사자가 입증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일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의심 먼저 하기 마련인 조사관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일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긴 분들이 많았죠.”  권영해 전 장관은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돼 현장에서 임관한 육사 2기생들의 예를 들면서 당시 군 행정상의 혼란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청년 박윤식이 다녔던 ‘보병학교’도 1년간 일시 폐교됐었다.

 

군인으로 먼저 순회한 국토(國土)

선지자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을 순회(巡廻) 하며 말씀 사역을 했던 것(삼상 7:16)을 연상케 할 만큼 박윤식 목사도 전국을 돌며 목회를 했는데, 그는 먼저 ‘군인’으로서 이 땅을 순회했다. 그 발길을 따라 선열들뿐 아니라 그 자신의 피땀도 젖어들었다. 그 시각 그 현장들은, 나라의 존망을 가를 만큼 위태로운 곳이기도 했다. 그는 그 터를 일일이 찾아내 그 위에 말씀을 위한 제단들을 세운 것이다. “국가의 역사 위에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는 그의 성경관과 역사의식에 근거해 보면, 오색은 구속사와 세속사가 만나는 가장 대표적인 지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글_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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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1 성막 화첩의 인기에 힘입어 번역 출간된「신묘한 영광의 비밀, 성막과 언약궤」 구속사 시리즈 제9권 영문판·일어판 출판 감사예배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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