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굴로 광풍 앞의 알렉산드리아호 그 속에 탄 나는 어떤 존재냐?
유라굴로 광풍 앞의
알렉산드리아호
그 속에 탄 나는 어떤 존재냐?
행 27:9-44
광풍 속에 표류하는 배 안에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홀로 우뚝 서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도행전 27:25)고 배에 탄 사람들을 확신과 소망으로 격려하고 마침내 다 구원해 내는 신령한 사도 바울은 오늘 어디에 있는가?
사도 바울이 타고 가던 배 알렉산드리아호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열 나흘 동안 흑암과 광풍 속에서 풍랑으로 시달려 모든 짐과 배의 기구조차 다 바다에 버리고 배에 탄 276명은 구원의 여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절망에 빠져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가운데 우뚝 선 한 사람,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받은 말씀 그대로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머리터럭 하나 상함이 없이 구원받았습니다(사도행전 27:1-44).
그렇다면 오늘 유라굴로 광풍이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바다 위에 표류하는 알렉산드리아호, 곧 지구호에 타고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광풍 속의 지구호에 탄 교회, 그 본연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지구촌에는 무신론, 반신론, 사신론, 살신론, 유물론, 진화론 등의 불신앙적 사상들이 범람하여, 인류는 마치 유라굴로 같은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7:14-20). 이 지구촌은 소위 기독교의 이름을 띤 자유주의 신학, 로마 카톨릭의 세속주의, 저급한 신비주의 등의 유라굴로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 배금사상은 황금 바알을 섬기게 하여 세계 인류가 경제만능이라고 하는 유라굴로 폭풍을 만나더니 그것은 마침내 세계적인 집단살인 문명을 낳게 하여 인류를 공포와 불안의 도가니로 휘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이라고 하는 유라굴로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 인구 폭발이라고 하는 유라굴로 폭풍 앞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 무서운 절망의 폭풍의 정체를 가리켜 짐승, 곧 옛뱀 큰 붉은 용, 거짓 선지자라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2장-18장).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사단)과 짐승의 입(무신론적 권력)과 거짓 선지자의 입 (어용 종교단체)에서 나와 세계 역사 속에 폭풍을 불러 일으킨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6:13). 저들은 천하 제국의 각계 각층 각종의 지도자들을 앞세워 폭풍의 앞잡이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요한계시록 16:14-16).
바로 우리가 1950년 6·25를 통하여 끔찍스러운 동족상쟁의 폭풍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전쟁의 폭풍 지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실상 지구호는 46억의 인류를 싣고 포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각 선실마다 아비규환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난파선의 현장에 기독교인이 함께 항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난파선 현장의 소망은 생명의 구원입니다. 결코 철학이나 과학이나 어떤 교육이나 문학 예술 등의 부분적인 땜질 작업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유라굴로 폭풍을 만났던 알렉산드리아호는 오히려 그 배 안에 있는 물건을 바다에 내던져 버렸습니다. 나중엔 배까지 못 쓰게 된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구원을 얻은 것으로 만족했습니다(사도행전 27:18-44).
지구호는 분명히 깨어져 버릴 한 날이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명백한 진리입니다(베드로후서 3:11-13, 요한계시록 16장-18장). 여기에 교회 존재의 의의가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인간 자체의 구령을 위해서 있습니다. 결코 교회가 얼마나 빵이나 사상 계몽, 윤리혁신, 신앙 사회운동, 신앙 문화운동 등으로 그 사명을 수행한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연의 사명은 아닙니다.
철두철미하게 구령의 복음, 십자가의 구원, 영생의 복음을 전함에 교회 본연의 사명이 있습니다. 새 하늘 새 땅의 도래, 새 임금의 왕도(王都), 새 신민의 삶을 교회는 이 세상에 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복음을 가진 자! 그는 분명히 깨어질 지구호의 종말 앞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근원적인 인간의 구원! 생명의 구원! 영원한 생명! 이것을 주는 것이 난파선의 주인공이 맡을 사명이라면 지금 우리는 어떤 존재에 처하고 있습니까?
저 옛날 욥처럼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 신앙이 감사를 작동시킨 그 크신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욥기 1:1-21). 바로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계획)을 믿는 신앙이고(욥기 1:16-19) 존재세계의 소유주를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이고(욥기 1:21) 예배드리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감사를 작동케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적신신앙 곧 ‘일어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즉 욥은 절망의 비보를 연속하여 들었을 때도, 결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믿음으로 감수하는 의연한 신앙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겸손하며 회개하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욥기 1:20). 그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을 믿고 인생의 적신상태를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예배신앙이 있는 사람에게 언제나 감사의 노래가 터지게 됩니다. 그 결과 참된 교회가 많이 서는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교회를 많이 세워서 나라와 민족이 살게 되는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입니다.
새사람 운동을 위한 구령 운동이야말로 애국하는 첩경이요 애족하는 첩경입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는 이 구령 작업만이 참 이웃과 사회를 위하는 길입니다.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어떤 오해나 핍박이나 심지어 박해 속에도 오히려 교회가 날마다 왕성하고 성장하여 뻗어갑니다. 대성교회의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날마다 왕성하고 성장하며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이제 욥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욥기 7:1-21 말씀을 볼 때, 욥은 어떤 존재로 살았습니까?
하나님만 경외하고 경건하게 신앙 생활을 하던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만난 고난의 폭풍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욥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나 되고 약대가 삼천 마리가 되며 소가 오백 겨리나 되고 암나귀 오백 마리가 있었고 종도 많았다고 욥기 1: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부자가 순식간에 다 잃었습니다. 그것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태웠습니다. 그리고 적군의 침략을 받아 빼앗기고 수많은 종들이 적군의 칼에 죽인 바가 되어 버렸습니다
(욥기 1:16-17). 더구나 일곱 아들과 세 딸 십 남매가 맏형의 집에서 연회를 즐기던 시간에 거친 들에서 불어닥친 대풍으로 그 집이 무너져 십 남매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욥기 1:18-19).
또한 욥의 몸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흐르는 진물을 처리할 수가 없어서 잿구덩이 속에 앉았습니다. 몸이 너무 가려워 견딜 수 없었던 욥은 기왓장 조각으로 피부를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욥의 아내는 욥을 저주했습니다
(욥기 2:7-9). 욥을 사랑하던 친구도 욥을 혐오했습니다. 동리에 사는 아이들까지도 욥을 조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은, 그가 만난 이러한 극한 상황을 가리켜 전쟁이요, 노역하는 품군이요, 자유가 없는 종이라고 욥기 7:1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밤이 두렵다고 했습니다(욥기 7:4). 욥의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혀졌다고 하였습니다(욥기 7:5). 욥의 생명은 운명 직전에 있는 한 호흡 같다고 했습니다(욥기 7:7). 욥의 마음은 아프고 그의 영혼은 괴롭다고 했습니다(욥기 7:11).
그래서 그는, 속히 숨이 멎어 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앙상궂게 남은 뼈로 있느니보다 죽는 것이 좋다고까지 항변을 토하고 있습니다(욥기 7:15).
욥은, “주여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입니다”라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욥기 7: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떤 존재로 취급하고 있는가를 또 알았습니다.
1. 주께서 크게 여기시는 존재로 알았습니다(욥기 7:17).
욥의 실존은 실로 아픔과 절망과 고통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이상의 상황에 이르고 말았던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욥을 ‘크게 여기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크게 여기신다’함은, 인격, 품위, 명예, 지위 등에 있어서 영광스러운 존재로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같은 용법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창세기 12:2)고 한 경우입니다. 솔로몬의 경우 그의 지위를 ‘더 크게 하시리라’(열왕기상 1:37, 47)고 한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여호와께서 솔로몬으로 이스라엘 무리의 목전에 ‘심히 존대케 하시고’ (역대상 29:25)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영광스럽게 여기며 창대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결코 인간 스스로가 자기를 위대하게 존귀한 존재로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크게 여기시는 한도 내에서 나(인생)는 존귀한 존재로 된다는 말입니다.
결코 나의 나 된 존재적 가치는 양이나 소나 나귀나 자식이나 아내나 친구 등에 의해서 크게 여겨짐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크게 여김을 받을 존재란 말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께서 나를 귀하 여기지 않을 땐 실로 그 존재적 목적이나 가치나 의의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나의 나된 존재적 가치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평가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꼭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잿구덩이 속에 던져 놓고 크게 여기는 존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습니다. 3층천에 다녀온 후에 14년 동안이나 침묵하면서 죽은 자를 살리고 심지어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과 악귀가 달아나게 했던 권능의 사람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육체의 가시였던 자기의 눈병을 고쳐 달라고 세 번 하나님께 간구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눈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고린도후서 12:1-10).
사도 바울도 고통 가운데 던져 주신 채 하나님께서는 “바울아, 내가 너를 크게 여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우리는 주의 마음에 두시는 존재입니다(욥기 7:17).
“주께서 사람에게 마음을 두시고…”라는 말씀을 새로 직역하면 “당신이 마음을 두시는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마음이 나(인생)의 나된 존재 속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베푼다’는 뜻이 됩니다. 참으로 기막힌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관심을 놓지 않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놓치고 모든 것에 거절을 당하고 자포자기 상태의 절망 속에서 딩굴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두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그에게서 떼어 놓아 버렸습니다. 참으로 적신 상태로 벌거벗겨 놓았습니다
(욥기 1:21). 잿구덩이 가운데 집어 던졌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마음은 욥에게 쏠렸습니다.
이런 경우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불같이 뜨거운 마음, 간절한 마음, 사랑의 마음, 축복의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 두심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극한 행복의 정원에 살게 하신 후에도 그의 마음에 나를 두십니다. 그러나 나를 벌거벗겨 잿구덩이 속 환란의 고통 속에 집어 던져 놓으시고,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나된 존재야말로 얼마나 행복합니까?
3. 주님께서 아침마다 우리를 권징하시는 존재입니다(욥기 7:18).
여기 ‘아침마다’라고 함은, 때를 가리지 않고 반복되는 주기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권징한다’는 말은, ‘방문한다, 참관한다, 간섭한다, 혼내준다, 따진다, 계산한다, 찾아간다, 심문한다’ 등의 뜻입니다.
창세기 50:24을 보면, 요셉이 죽으면서 그 형제들에게 유언할 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하는 경우입니다. 사사기 15:1을 보면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하는 경우입니다. 사무엘상 14:17에 “점고(點考), 곧 점호하여 보라”는 경우입니다. 욥기 31:14에 “국문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시편 17:3에 “밤에 나를 권고하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마치 의사가 시간을 정해 놓고 환자를 찾아가듯 하는 경우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잊지 않고 나에게 사랑의 연민을 가지고 내 인생 여정을 깨우치고 파헤치며 인도하시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잘못 생각할 때 마음에 빛을 주시고 범죄했을 때 혼을 내어 주시고 회개하도록 나의 나된 인생을 권고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순간마다 단련시킵니다. 만약 고난이 아니면 축복으로써도 연단시킵니다. 만약 아픔으로써가 아니면 기쁨으로써 우리를 단련시킵니다(시편 11:4-5).
4. 주님께서 분초마다 나를 시험하시는존재입니다(욥기 7:18).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분초마다’는, ‘찰나, 순간, 돌연히, 갑자기, 연속적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뜻은 “항상 돌보며 살핀다”는 뜻입니다(이사야 27:3, 시편 66:10, 11:4-5, 역대상 29:17). 한시도 욥을 떠나지 않고 간섭하고 붙잡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좀 간섭만 하면 “다 알아서 할 테니 놓아 달라”고 인간들은 함부로 말합니다.
욥의 수면도 (욥기 7:13-14), 욥의 호흡도, 욥의 침 삼키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간섭하고 계셨습니다(욥기 7:19, 시편 139:1-3).
욥의 고백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욥기 7:19, 14:1-6).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욥기 7:19). 하나님이 자기를 감찰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욥기 7:20, 시편 36:6, 이사야 27:3). 자기가 하나님의 ‘과녁’이 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욥기 7:20, 과녁은 화살의 방패, 표적 혹은 일종의 장애물, 걸림돌). 활 쏘는 자가 목표물을 쏘듯이 하나님께서 욥을 계속하여 고난으로 괴롭히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욥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인생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천하보다 더 크게 더 귀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 마음에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소원물인 존재입니다(빌립보서 2:13).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 양의 이름이 있는 존재입니다(요한계시록 14:1-5). 주님의 마음과 손에 새겨진 존재입니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된 존재입니다(마태복음 10:30). 그 누구도 나의 나된 인생을 함부로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파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아침마다 분초마다 절대하신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와 보호를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시편 41:10-13).
결코 나의 나된 존재는 내 마음대로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보배로운 피 흘려 속량하신 예수님께 팔려간 나의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마다 나를 찾아 주시고 분초마다 나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마침내 욥은 폭풍을 이기고 일어섰습니다.
그렇게 되어 버린 욥의 존재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 위대한 사실을 깨달은 욥은, 나중에 다시 고백하기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겠다”고 욥기 13:15에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욥의 기도는 감사가 차고 넘치는 정결한 기도밖에 없었습니다(욥기 16:17). 마침내 욥은 처음보다 배나 더한 복을 받고 누리는 복까지 입지 않았습니까(욥기 42:10-17, 이사야 61:6-7).
하나님은 나를 크게 여기십니다. 우주와 세상 만물보다 더 크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마음속에 두십니다. 주님은 나를 아침마다 권징하십니다. 주님은 나를 분초마다 시험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 환란의 잿구덩이에 앉아 있을지라도 주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믿고 바라고 복락의 끝을 감사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욥기 42:10-17을 읽어 봅시다.
욥의 딸 여미마는 ‘낮’이란 뜻이고 긋시아는 아라비아에서 나는 향나무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기쁨의 상징입니다. 게렌합북은 ‘검은 칠(눈가를 검게 그려서 눈이 커 보이도록 하는 화장품)을 넣어 두는 통(뿔로 만든 것)’을 가리킵니다. 곧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욥의 딸들의 아름다움은 욥에 대하여 그 축복의 아름다운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욥의 회복은 아름다움의 회복이었습니다. 밤 같은 환란에서 낮 같은 밝음의 축복이었습니다. 욥의 딸들의 아름다움은 욥이 밝은 시대를 만난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시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충분히 삶의 기쁨을 누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 중심’을 근본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모두 거짓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잠언 31:30, 11:22).
우리의 고난은 잠간입니다(고린도후서 4:17).
욥은 고난 후에 140년을 더 살며 복을 누렸습니다(욥기 42:16).
하나님은 우리를 만국의 보배로 여기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고 하시지 않습니까.
1986년 10월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