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 노리스(Jan Norris) 장군의 구속사 여정
2019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의미있는 「구속사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는 평강제일교회 젠 노리스(Jan Norris) 장로의 ‘장군(brigadier general) 진급’을 축하하는 공식 기념식 행사 직후에 개최된 것으로, 미 태평양사령부 산하 각급 부대의 많은 장성과 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특히 사령부 전체의 수석 군목(軍牧)을 비롯한 예하부대의 군목들이 함께한 자리여서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평강제일교회와 국내외 지교회에 많은 각급 군인들이 있고, 장성 출신들도 적지 않지만 교회를 섬기는 중에 맞은 장성 진급으로는 처음이어서, 온 성도들의 기쁨과 축하의 마음은 더욱 컸다.
노리스 장군은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출생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조부모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유독 군과 인연이 많은 집안이었다. 1차 세계대전, 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 등 주요 전쟁마다 가족들이 참전했다. 일반대학을 졸업한 뒤 1991년 학사장교를 지원해 입대한 것은 이런 인연에서였고, 한국에 근무하러 온 것을 계기로 부인 이진영씨와도 만나게 되었다.
평강제일교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버지니아에 머물던 1997년이다. 부인 이진영씨가 당시 인근 지교회를 시무하던 오용한 목사님 등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게 되었는데, “성령의 인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구나”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지교회는 거리가 멀어 다닐 수 없었고, 얼마 안가 근무지를 옮기게 됐지만 말씀과의 인연을 끊이지 않게 한 힘이었다.
1999년 LA 근무시절 지교회에서 박아브라함 원로목사를 처음 만났고, 2001년 서울로 부임하면서 오류동 평강제일교회를 다닐 수 있게 됐다. 2003년 서울을 떠나기까지 외국인 선교회인 「실로선교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말씀과 가까워질수록 노리스 장군 부부는 ‘교회 생활’에 대한 간절함으로 애태웠다. 미국 지교회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중부 캔사스주에서 근무하던 2007년 무렵부터는 “지교회 근처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뒤에 기도가 이뤄져 LA, 플로리다 탬파, 워싱턴D.C., LA 등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특히 2012년 플로리다 탬파 근무시절에는 2시간여 운전으로 올랜도 지교회를 다닐 수 있었다. “마침 「구속사 세미나」가 자주 열리던 시절이었는데 박아브라함 원로목사를 자주 뵐 수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부인 이진영씨는 회고했다. 세미나 때는 집과 교회를 오가지 않고 아예 교회 근처에 숙소를 잡고 참가했다. 노리스 장군은 “이 시기,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지키는 일에 대해 박아브라함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많은 조언을 들었다”고 했다. 장로 장립을 받은 건 이 시기였다. 그는 박아브라함 원로목사로부터 직접 장로 안수를 받은 것을 지금껏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2014년 대령으로 진급할 때 박아브라함 목사가 “장군까지 갈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을 했다는 것을 전해듣고 노리스 장군 부부는 “그저 믿어지고 의심이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사관학교나 학군장교(ROTC)도 아닌 학사장교 출신인 데다 여러 종합적인 환경 등을 감안했을 때 가능성이 큰 것은 아니었다. 성도 가운데 장군이 배출되길 기다렸던 박아브라함 원로목사의 기도는 이렇게 해서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먼저 성취되었다.
2015년 캘리포니아 근무 때는 처음으로 아예 거처를 따로 잡았다. 노리스 장군은 부대 근처에 혼자 거처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LA 지교회 근처에 살았다. 가족 상봉은 2주에 한 번 36시간만 가능했다. 노리스 장군은 격주로 금요일 저녁 LA로 나왔다가 주일예배 직후 부대로 복귀했다. 이번 여름, 장군 진급이 확정된 뒤 노리스 장군만 남겨두고 가족들은 조지아주 아틀란타 지교회 근처를 정착지로 삼았다.
노리스 장군은 군 생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가족과의 이별”이라면서 “아내와 딸들이 자라면서 떨어져 몇 년을 살아야 했다”고 했다. (인터넷에 나온 그의 주요 경력은 20개쯤 된다. 캘리포니아 4차례, 하와이 2차례, 서울 2차례 등을 비롯해 동부, 서부, 중부를 오가며 근무했다. 가장 긴 것이 3년 1개월이었고 나머지는 평균 2년이 되지 못했다. 커리어를 풍부하게 하는 이런 요소들이 그의 진급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당사자뿐 아니라 부인, 세 딸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면서도 노리스 장군은 “나는 우리 가족의 경험을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의 여행으로 여긴다. 우리는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옮겨 다녔고 흥미롭게도 종종 지교회 가까운 곳에 배정되었다. 그래서 미국 전역과 한국에 있는 많은 지교회 가족 구성원들을 알게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와 내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존재함을 믿는다”고 했다.
노리스 장군은 진급 기념식을 그저 자신을 위한 예식으로만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 구속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눠온 군목에게 평강제일교회 담임목사가 하와이에 오기로 했으니 「구속사 세미나」를 열자고 제안해 성사됐다. 전적으로 구속사를 향한 열심의 결과물이었다.
노리스 장군은 “나의 진급이 세속적인 의미로는 대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더 큰 보상은 평강제일교회의 일원이자 장로가 된 것이고 박아브라함 원로목사님과 하나님의 말씀, 구속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만나고 알게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항상 구속사의 말씀을 나눌 것이고, 할 수 있는 한 언제라도 구속사 세미나를 열 계획”이라며 “하나님이 나에게 이 위대한 소명과 의무를 충족시킬 힘과 에너지와 지혜를 주시도록 온 성도들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한다”고 했다.
노리스 장군은 태평양 전역의 모든 통신부대와 소속 군인, 민간인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았다.
글_참평안 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