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하나님의 능력
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하나님의 능력
막 9:14-29, 빌 4:13
신념이 없고 의심이 그 마음에 있으면 점차 늙어갑니다. 그러나 희망은 사람에게 생기를 돋게 하고 젊어지게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승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삶에 아름다움과 소망, 격려와 용기가 없기에 만족이 없이 오직 쫓기는 삶뿐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능력의 축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 들린 자를 보십시오. 귀머거리에 벙어리, 간질병이 걸린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모실 때 모든 문제 해결의 능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가능성의 꿈을 꾸는 능력을 선물 받습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소망의 꿈을 꾸며 예수님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에게 희망찬 ‘가능’의 꿈을 꾸게 하신 장본인이 되십니다. 아버지는 수많은 무리 속에서 소리 높여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막 9:17).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가능성의 꿈을 꾸게 하십니다. 마가복음 5:25-34을 보십시오. 한 여자가 12년 동안 피가 줄줄 흐르는 혈루병에 시달렸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받다가 재산도 모두 잃고 이제 살 길이 다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마음속에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자기 병에서 놓임을 얻으리라는 소망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주변을 인산인해 같은 인파가 두르고 있지만, 부정하고 허약한 여인의 몸으로 ‘가까이 가겠노라’ 하는 가능성의 꿈을 가진 이 여자를 보십시오! 가자마자 인사도 없이 바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다. 여자가 놀라서 “제가 만졌습니다!”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에서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지 못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말씀하시며 주 앞에 오라고 하지 않고 평안히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전능하셔서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왜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까? 어딜 가든지 승리할 수 있는 충분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2-11의 간음한 여인을 보십시오. 모세 율법에 의해 당장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글을 쓰시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한마디로 정죄하던 수천 명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하시며 자유의 꿈을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삭개오의 마음에 구원의 꿈을(눅 19:9), 38년 된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에게 재생의 꿈을 그려주셨습니다(요 5:6-8).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의 꿈이 믿음이요, 동시에 능력입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대한 소망으로 삼는 꿈이 있는 자, 곧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75세부터 100년의 신앙 노정을 소망을 안고 한 걸음씩 걸어갔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소망의 꿈은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과 믿음이 사람을 강퍅케 만드는 죄의 유혹을 이깁니다(히 3:13).
믿는 자는 용단의 능력을 선물 받습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그는 이 아들을 고칠 소망의 꿈이 일어나자 지체하지 않고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에 이 아이를 세워 놓고 이르기를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했습니다(막 9:22). 그때 주님은 크게 책망하시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막 9:24).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신앙의 용단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믿습니다!” 고백이 있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마 16:24).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로 다시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자세입니다(막 8:35, 눅 9:24). 먼저 자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에게 “먼저 주라”(눅 9:24), 크게 되어 섬김을 받고 싶은 자에게 “자기를 낮추고 섬기라”(마 23:11-12)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신앙의 용단이 있습니까? “내가 믿습니다!” 하며 그 자리에서 순종하는 용단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신앙을 가지시길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꿈을 주실 때에는 곧바로 그것을 실현해야 합니다.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끝장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용단입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고 전진해야 하는데, 주님의 격려를 듣기보다 사람의 말을 들으니까 자꾸 나약해지고 허약해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꿈을 가졌든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친다는 각오로 그 일에 용단을 가지고 덤벼들어야 합니다. 홍해 앞의 모세에게, 요단강 앞의 여호수아에게 이런 용단이 있었고, 뜨거운 풀무불 앞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또 사자굴 앞의 다니엘에게 이런 용단이 있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용단의 능력을 주시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가능’의 기회가 도착할 때 용단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시작은 반’이라는 속담은 용단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성공의 비결을 두고 하는 말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소망의 인내의 능력을 선물 받습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이 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주님의 용단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가능’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실로 흥분되는 순간입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①그 누가 꺾을 수 없는 강한 기대가 계속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의 소망이 타오릅니다. ②주님께서 반드시 도와주고 말 것이라는 정열적인 신념만이 불타고 있습니다. ③의심을 용납할 수 없는 성취를 맛보는 순간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용단의 걸음을 걷는 사람들은 실패를 인정할 줄 모릅니다. 후퇴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의 인내를 감수하는 시간은 모든 것을 투자하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 때로는 어려움과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낭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고, 성공의 축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은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버리는 심리입니다(마 13:44). 그것은 소망의 투자요 인내의 투자입니다. 인내는 곧 믿음에서 오는 능력입니다.
능력으로 인해 만족을 성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 속에 있는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귀신은 최후발악을 했고 아이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고 절망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부자(父子)는 새로운 활기를 얻어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마 9:25-27). 결국 아이의 아버지는 그의 소원을 이루고 말았으니 이것이 기독교의 응답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은 절망의 경지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랄 때에 독수리 같은 청춘 신앙을 받아서 훨훨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희망에 찬 소원을 가진 사람은 패배를 당하거나 사라져 버리는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저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용감했고, 지혜로웠고, 영웅적인 삶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저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경우의 위협도 무릅쓰고 기회를 포착하여 용단 있는 모험을 감행하는, 성령의 충만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께로부터 가능성의 소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의 경지에서 오직 예수께만 모든 ‘가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들은 오뚜기같이 넘어질 줄 모르는 소망의 인내를 가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축복의 성취를 맛보고야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얻어지는 능력! 가능성의 꿈! 용단의 능력! 소망의 인내! 만족하는 성취! 이 모든 것들이 오늘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84년 1월 22일 주일 2부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