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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 특별기획]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과 그 희생

2019.03.24 22:53

 

애 어른 할 것 없이 삼천리금수강산 온 땅을 붉은 선혈로 물들인독립운동, 만세의 함성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마디마디 아픈 상처가 맺혔습니다. 맨주먹을 가지고는 총칼 가진 일본과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일제는 총과 대창, 창검으로 만세 부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고 마구 총질을 하였습니다. 

만세운동은 개성에서 북으로 올라가 선천에서는 서울과 같은 시간에 학생들이 앞장서서 교회 종소리를 신호 삼아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기수였던 신성학교 교사 강신혁이 일제의 총에 맞아 쓰러져독립운동의 장렬한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태극기를 흔들다 양팔을 잘린 이도 있었습니다. 

“정주와 청원에서는 처절한 싸움도 있었는데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던 최석월과 변갑섭은 일병(日兵)이 내리치는 칼에 태극기를 든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자 엎드려 왼팔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돌진해 나갔다. 격앙된 일병들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으나 그들은 끝내 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나가다 다시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저들의 칼끝에 비통한 최후를 마쳤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는독립운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독립운동 하면 막연하게나마 ‘유관순 누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유관순은 지금부터 92년 전 너무도 냉혹한 시대에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열사입니다. 

독립운동 당시 유 열사는 18세로, 이화학당의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보통학교 1학년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그녀는 교비생(장학생)으로 추천될 만큼 똑똑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강력하게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님을 뿌리치고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시위 군중에 끼어들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벌어진 수만의 학생단 시위에도 학교 담을 넘어 참여했습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가 외국인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겨우 풀려나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3월 10일 임시휴교령이 내려졌고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내려왔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3월 16일 주일 밤 예배를 마친 후 아버지 유중권(1863-1919년), 어머니 이소제(1875-1919년),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과 함께 “우리 고장이 죽은 듯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아우내(병천)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이 후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하였습니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9시쯤, 아우내 장터에는 3,000여 명이 넘는 장꾼을 가장한 군중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우내 장터는 겉으로는 손님을 부르며 물건값을 흥정하는 등 북적거리는 듯하였으나 서로 눈빛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태극기를 몰래 주고받으며 옷 속에 얼른 감추는 등 얼마간의 긴장이 지속되었습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긴 대나무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장터 중앙에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낭독을 마친 조인원이 먼저 두 손을 높이 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이에 군중들도 함께 만세 소리를 외치며 행진할 때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습니다. 유중권, 김구응, 김상헌, 김구헌, 김교선, 조병호 등이 조인원을 뒤따랐으며 곧 그 뒤에 유관순과 어머니 이씨, 각 고을에서 모여든 군중들이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며 대열을 지어 나아갔습니다. 조인원은 선두에서 용감하게 만세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때 유관순도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습니다. 재빠르게 달려온 일본 헌병들은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총검에 찔려 피를 흘리는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면서 발로 차고 때렸습니다. 아버지 유중권은 잔혹한 일본군이 자기 딸을 발로 차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 뒤따라가면서 거듭 ‘만세’를 절규하듯 외쳤는데, 바로 그때 잔학무도한 헌병 하나가 유중권의 옆구리를 총검으로 찌르고 이어 머리를 찔러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이 시위하는 군중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총을 쏘았습니다.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도 남편의 죽음을 보고 더욱 분기가 일어나 시위운동에 나섰다가 피살되었습니다. 

이날 무자비한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장렬하게 죽었고, 주민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제의 총칼에 무참히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정신이 아득했던 유관순은, 주동자 체포에 혈안이 된 일본 수색조에 의해 중상을 입은 채로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날 공주에서는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이 공주에서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감리교 목사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의 칼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총검에 의해 한날한시에 참혹하게 죽어 간 부모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어린 유관순 열사는 독사보다 더 지독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습니다. 이에 항소하여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된 후 6월 30일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다시 3년형을 받았으며, 이후 유관순은 고등법원에 상고를 하지 않아 1919년 7월 4일, 징역 3년이 확정되었습니다. 조인원과 숙부 유중무는 같이 상고하자고 권유하고 설득하고 타일렀으나, 유관순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삼천리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서대문 감옥소에서도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끌려 나가 발길로 차이고 모진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특히독립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옥중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만세소리는 감방마다 연쇄폭발을 하듯 터져 나왔고, 이때 3천 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호응하여 변기 뚜껑으로 철판 벽을 두드리고 발길로 문짝을 차는 등 요란했을 뿐 아니라 모화간, 냉천동, 애오개, 서소문 등 감옥 바깥에도 시위가 퍼져나갔습니다. 

간수는 감옥소에서의 만세시위가 처음이 아니었던 유관순을 소동의 주모자로 지목하였고,
1평도 안 되는 지하 감방에 그녀를 가두고는 온갖 매질과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끝끝내 자주독립 주장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 서리가 서대문형무소 병사로 면회를 가서 보니, 유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얼굴이 퉁퉁 붓고 병색이 완연했다고 합니다. 감옥 안에서 함께 수형했던 어윤희 여사는 유관순 열사가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흐느끼고 울부짖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어윤희 여사는 유관순이 너무 매를 맞고 모진 고문을 당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다리를 천정에 끌어올려 매고 비행기를 태우고… 물을 붓고…”라고 유관순이 당한 고문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유관순은 항상 허리를 감싸 안고 고통스러워했는데, 병천에서 붙잡힐 때 창에 찔린 것이 도무지 낫지 않아 계속 고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수시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몸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오빠 유우석이 6개월 형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 유관순에게 마지막 면회를 갔을 때,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으며 맞잡은 손의 자국이 그대로 눌린 채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손가락으로 눌러 만져 보니 살이 썩어서 손에 피가 묻어 나왔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간수를 붙들고 애원했으나, 유관순은 감옥 내 소동을 선동하는 중죄인으로 낙인찍혀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3년형을 받았던 유관순은 특별사면령(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일본 왕궁 손녀의 결혼)에 의해 절반만 살고 나오도록 되어 있어, 1919년 4월 1일부터 계산하면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30일이면 형기가 만료되어 출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한 구타와 오랜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 몸이 썩어 들어가는 등 고초를 당하다가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19세의 꽃다운 청춘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가족들에게 유관순 열사의 사망 통지를 하였으나, 독립운동 시위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하여 소식이 없었고, 이어 가까운 친족을 수소문하는 데도 시일이 많이 흘러 시신은 보름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도 죽고, 할아버지 유윤기는 큰아들 유중권 내외가 한날에 처참하게 죽은 충격에 두 달 보름 뒤에 숨졌으며, 숙부도 복역 중이었고, 어린 동생들(관석, 인석)은 공주 영명학교 교감 댁에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10월 12일 들것에 실려 이화학당으로 들어왔을 때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미 부패한 지 오래되어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출옥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열사가 참혹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이화학당 친구들은 얼마 안 있으면 나올 줄로 알고 옷과 머리핀을 준비했는데, 시신을 보자 기겁을 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여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 서리가 시신을 인수받았으며, 공주 감옥에서 같은 감방에 있었던 김현경은 무명천을 떠서 밤을 새워 눈물로 얼룩진 수의를 지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유관순을 진정한 영웅으로 평가하여 다시 비단 옷감으로 수의를 만들어 바꾸어 입혔습니다. 또 태극기를 만들어 그녀의 가슴 위에 덮고 입관하였습니다. 

이틀 뒤인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가족 외에 같은 반 학생 대표 몇 명만 장례식장에 참석하였는데 형사가 명단을 들고 일일이 대조하며 참석을 제한하였습니다. 유관순의 유해가 나갈 때는 월터 학당장 서리와 학생을 대표하여 김활란 선생이 뒤따랐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비석도 무덤 표지도 없이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곳이 군용기지가 되면서 파헤쳐져 열사의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 위의 내용 중 일부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이정은 저(著) 「유관순-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사단법인 류관순열사 기념사업회, 2005)을 참고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집안에서 자라 학교 근처의 정동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을 키웠으며, 그의 깊은 신앙심은 일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독립운동이라는 거사를 이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게다가 연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 배경과 순수하고 올곧은 성품, 옥중에서도 일제 앞에 결코 굽히거나 타협 없이 꿋꿋하게 타올랐던 대한독립의 의지, 독실한 신앙, 그리고 일제로부터의 모진 학대를 견뎌 낸 투지 등을 되새겨 볼 때, 그녀의 남다른 애국충정은 결코 한순간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독립의 염원과 그 민족정신을 온몸으로 보여 준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린 열사의 가슴에서 초지일관 식지 않았던 대한독립의 뜨거운 함성, 일제의 총칼도 꺾지 못했던 그 민족혼이, 오늘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한 불씨로 남아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했던 서민들은 수십만 명에 이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어 놓은 이들은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독립운동의 주역들입니다. 우리들이 조국 대한민국의 품에서 현재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까지 이러한 수없는 눈물과 피의 희생이 그 터전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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