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고 더하기를 잘 했느냐
빼고 더하기를 잘 했느냐
왕상 17:13-16, 갈 5:16-24
‘두 번째 성경’이라고 불리는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은 “신구약 성경은 빼고 더하기, 둘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산수 공부’입니다. 뺄셈과 덧셈 중에서도 성도는 하나님께서 뺄셈 시험을 내실 때 합격해야 합니다. 욥은 수많은 재산과 종들, 그리고 10남매까지 하루아침에 잃는 ‘뺄셈의 시험’에 직면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악담하며 시험에서 낙제했지만, 욥은 “주시는 분도,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신앙을 지킴으로써 합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엘리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아내 이세벨이 수많은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격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3년 6개월간 비는 물론, 이슬도 이스라엘에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마침내는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지정해 주셨던 피난처까지 메마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시돈 땅의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가서 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에 ‘아마 좀 여유 있는 부잣집인 모양이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보니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물 좀 갖다 주시오” 청한 뒤 또다시 “떡 한 조각을 가져오시오” 했습니다. 그러자 과부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며 말했습니다. “떡이 없고 한 줌 가루와 기름 조금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뭇가지를 주워서 마지막으로 조그맣게 떡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때 엘리야가 말합니다. “그런 소리 말고 우선 나를 대접하라. 나를 위해 먼저 조그만 떡을 만들어 가져오고, 그 뒤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라”
이것은 아예 명령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몰인정하고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어디 있습니까. 무자비하고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자기는 살고 나와 어린 아들은 죽으라는 말인가?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사렙다의 과부에게 “엘리야가 가니 그를 부양하라”고 통지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왕상 17:9).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그들이 빼기도 잘하고 더하기도 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과부는 하나뿐인 아들이 “엄마, 배고파” 하며 울자 단지에 겨우 한 움큼 남은 밀가루를 꺼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반죽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에 타서 끓여봐야 허연 가루만 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남은 식량을 놓고 엘리야가 “너와 아들 먹지 말고 나를 대접하라” 할 때 과부의 선택은 ‘빼기’였습니다. 자기와 아들이 먹었으면 ‘더하기’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렸으니 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그 후로 3년 6개월 동안 밀가루통도 기름병도 비지 않도록 끝없이 채워 주셨습니다. 과부는 뺄셈 공부를 참으로 잘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맡고 있습니다. 교회와 교구, 기관의 직분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빼오셨습니까? 더하기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차지해야지, ‘’내가 가져가야지’, ‘내가 해야지’,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알 바 아냐”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저 ‘내가!’ 만 앞세우지 않았습니까.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자기 시간을 뺐습니까. 24시간 중에 주님의 뜻을 위해 찬송하고,기도하고,성경 읽고,전도하는 데 얼마나 뺐습니까.
‘내가 전도하러 나가면 아이가 학교 갔다올 때 밥은 누가 줘?’, ‘집에 있어도 추운데 내가 누굴 위해서 전도하러 나가? 날 좀 풀리고 따뜻해지면 그때 하지’ 하는 것은 모두 ‘보태기’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각, 내 의지, 내 계획을 빼야 합니다. 그런데 “집사님, 심방 가실래요?” 하면 “아이고, 나 오늘 약속 있는데” 합니다. 있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태 주셔야 할 텐데, 자기가 보태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과 안타까운 일이 그 집에 닥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빼는 삶을 살았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동족들에게 공갈, 협박을 당하고, 일주일 동안 바다에 빠져 있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춥고 배고팠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난과 비난에 직면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삶에 아무 보탬이 안 됐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는 얼마나 부요(富饒)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태 주는 것을 보십시오. 늘 마음이 편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았고, 욕을 먹어도 욕을 먹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욕설을 하면, 하나님은 좋은 이름으로 보태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뺄셈 문제를 내서 시험을 치게 하고 계십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고 빈틈없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도 움직이고, 엘리야 선지자도 움직이셨습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떡을 만들어 가져오라 할 때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태느냐 빼느냐의 시험 문제를 내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말한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재산 일부만 잘라내 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을 몽땅 털 수 있느냐의 시험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순종의 종교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삼상 15:22-23).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평생 예수님을 믿겠다면 더하고 빼는 것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신구약은 오직 그것 뿐입니다. 내가 뜻을 위해 죽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가장 먼저 이수해야 할 과목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르밧 과부가 치른 시험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스스로 몇 점일지 채점해 보십시오.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써 있는 몇 천년 전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아이는 배고파서 울고, 마지막으로 멀겋게 죽이라도 쑤어 주려고 나섰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너희는 죽든지 말든지 나를 대접하라고 할 때, 아무리 믿음이 충만한 권사,집사라 해도 사르밧 과부처럼 하겠습니까. 각자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죽고 나면 내가 어디 있습니까. 완전한 뺄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25-27에서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라고 이 일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들이 있는데, 엘리야에게 그들 대신 이방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믿었다고 하는 자들은 수학을 못합니다. 빼지도 못하고 보태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 사렙다 과부는 자기가 죽든가, 자식이 죽든가 상관하지 않고 다 뺐습니다. 그저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인데 아멘 해야지요’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에 불쾌히 여기지도 않았고, 꽁알꽁알대지도 않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뺄셈을 보시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보태주셨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엘리야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쓸모없는 모양으로 말했지만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를 쓸모있는 모양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6 이하의 말씀을 봐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가 손해보고 빼는 것이 기적과 부요의 축복을 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와 식구들만 위해 창고를 짓고 재물을 쌓아둔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은 “내가 오늘밤 네 생명을 가져가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참으로 순종이 쉽습니까? 하나님은 사렙다 과부에게 먼저 계시를 주셔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을 너희 집에 보낸다. 걱정 말고 무조건 순종해라’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자기를 다 뽑아서 던져버리고, 자식까지도 던져버리고 완전히 제로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아낌없이,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고 드린 것입니다. 아들이 “엄마, 나 배고픈데 누군지 모르는 저 사람한테 왜 줘?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비수로 찔리는 듯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아서 만나가 복된 장마비처럼 (출 16:4), 노다지처럼 쏟아지듯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시험에 낙제점을 받고서야 무슨 복을 받고, 어디에 취직을 하겠습니까.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신앙의 자리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사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유 없이 결단했습니다. 그저 “아멘!”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둘 사이에 껴서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듣고 실천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두 번 들었습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용서해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하고 흐느껴 놓고는 다음에 기도할 때 또 똑같이 기도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삶입니다.
십일조도 ‘빼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것인데 내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이제는 빼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기와 아들을 빼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탰습니다. 오히려 적선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던 여자지만, 겸손과 섬김과 모험과 희생과 용기로 하나님이 출제하신 고난도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함으로써 그 아들까지도 어머니 때문에 복 받았습니다. 극심한 가뭄과 기근 속에서도 뚜껑만 열면 밀가루가 가득하고, 기름병에서는 기름이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이 축복이고 기적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인은 남을 위해 좀 희생도 해야 합니다. ‘아니, 내가 내 밥 먹고 사는데 왜 저 사람들 위해서 내가 보태 줘야 합니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실 때는 그 이면에 힘과 능력과 복도 주시겠다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힘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직면한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뺄 수도 있고 온전히 내어줄 수도 있을 때 늘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시계추가 ‘똑딱’ 하며 움직일 때 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과 괴로움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는 그 어떤 순간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욥 같은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기한 기적이 나타납니다. 기적은 자연법칙에 의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현현(顯現)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보는 창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창문이 안 보이지만, 믿음이 있으면 창문이 보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표현이요, 신앙은 기적의 내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신앙 활동 속에 함께 사시고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부요하게 되는 것은 잠 못 자고 악착같이 벌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때 이뤄지는 것입니다. 기적은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 것을 포기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것을 아까와하고 남의 것을 이용하려고 하면 점점 가난뱅이가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서 빼 가시려고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보태려고만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순간 마음에 그림자와 어둠이 깃든 것을 하나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빼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발벗고 앞장서는 평강제일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도록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친밀함이 내게 있습니다 (시 25:14). 당신의 비밀을 사람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죄악 된 인간이고 피조물인 아브라함을 친구로 삼으시고, 그 없이는 못 산다고 하신 하나님입니다 (대하 20:7, 사 41:8, 약 2:23). 아브라함 역시 빼고 보태기를 잘한 사람입니다.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獨子)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바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열왕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고, 대적의 문을 연다’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 복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수학 숙제를 잘 하고 이 시간까지 오셨습니까. 성도의 의무도 하지 않고, 주일 헌금도 아까와하고 떼어 먹지 않았습니까. 햇빛,달빛,별빛,우리가 마시는 공기의 값, 우리는 편안히 자지만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 헌금 바치는 것을 아까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빼야 할텐데 너무 부족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한 움큼 가루처럼, 과부의 한 렙돈처럼 받아 주십시오.’ 하는 심정으로 해야지, 주머니에서 만 원 짜리 나올까 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헌금해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식에게는 아까워하지 않고 꿔서라도 몇 백만원씩 주면서, 하나님 사업은 외면하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는 원하면서 광야 40년길을 걷는 것은 싫어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적의 믿음은 우등생들에게 장학금으로 내주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기적은 없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으로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차지도 덥지도 않으니 토해 팽개친다고 하셨습니다. 빼지도, 보태지도 않고, ‘교회 일 다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꾸었다’ 하십니다 (잠 19:17). 하나님이 꾸셨는데 갚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져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주십니다 (시 37:25-26). 교회 위해 헌신,봉사할 때도 희생으로 하십시오. 남의 얘기 하면 벌써 사탄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남이 실수한 것도 좋게 말해주고 감싸주는 것이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뺄셈 출제하실 때 한 사람도 낙제생 없이 합격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개인과 가족과 직장과 사업과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생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뜻을 위해 오늘날까지 빼지 못 한 것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들어 죽고 싶을지라도 영적 뺄셈, 덧셈의 산수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뺄셈 공부를 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출제하신 뺄셈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주님 저희들에게 믿음의 두터움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항상 은혜 속에서 감사하는 순종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귀한 아들딸이 아닙니까. 하나님, 끝까지 붙잡아 주시고 천국에 입성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빌고 원하올 때 거룩하신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감사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2005년 12월 15일 (목) 남선교회,여선교회 결산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