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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혀지고 열려지고 (하나님의 마침표와 사가랴의 물음표)

2019.02.22 15:02

닫혀지고 열려지고
하나님의 마침표와 사가랴의 물음표

눅 1:5-23, 57-66

 

 

 

오늘 본문은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인 사가랴와, 그의 아내인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기억하신다’, 엘리사벳은 ‘하나님과 맹약(盟約), 즉 맹세함으로 약속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 없이 행했던 의인이었지만 엘리사벳의 잉태치 못함으로 인해 나이 많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닫혀지고

제사장인 사가랴가 어느 날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 우편에 섰습니다. 놀란 사가랴에게 천사는 “사가랴야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할 사가랴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내가 나이 많아 늙고 기운도 없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 한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하고 말했습니다. 가브리엘은 기쁜 소식만을 전하는 1급 천사장입니다. 이쯤 되면 사가랴는 마땅히 무릎 꿇고 “아멘” 하고 말씀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가랴에게 가브리엘 천사장은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니라” 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입이 닫히고 만 것입니다.

왜 닫혔습니까? 불신의 말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권적 하나님, 임의로 (마음먹으신 대로) 하시는 하나님입니다(삼상 2:6-8). 가브리엘 천사장이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한 것으로 볼 때 사가랴는 아들을 달라고 오랫동안 하나님께 간구해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들으시고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하고 응답하신 것인데 사가랴는 그 기쁜 통지를 받고도 “어떻게?” 하고 반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라고 하셨습니다(고후 1:20).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왜 그럴까?” 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 여러분에게 “10억 원 도와드리겠습니다” 한다면 의심 없이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흠 없이 행한 의인’이라 했던 사가랴인데 천사가 하나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와 말씀할 때 순간적으로 “아멘”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는 헬라 원어로 ‘카타트’입니다. ‘무엇에 의해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증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의심의 이유를 제시한 것입니다. ‘나는 못 믿겠습니다. 의심이 납니다. 무엇에 의해서 그렇게 된단 말입니까?’ 한 것입니다. 그는 겸손의 대답 대신 표적과 확증을 요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가브리엘이 다시 ‘내가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수천만만 천사의 천사장이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왔지 않느냐’ 라고 했을 때, 그 때라도 무릎 꿇고 “잘못했습니다. 다시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하고 말씀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사극을 보면 임금의 교지가 내려오면 보이지도 않는 상감마마에게 큰절을 하고 덜덜 떨며 교지를 받지 않습니까. 만약 사가랴가 그렇게 했다면 사람도 아니고 영물(靈物)인 천사가 그 마음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사가랴에게서는 그런 믿음의 틈조차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장이 “너는 일이 이루기까지 벙어리가 돼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벙어리가 돼서 열 달 동안 한번 살아보십시오. 물건을 살 수 있습니까. 돈을 줘도 제대로 거스름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자식이 뭐라고 말하는데 제대로 답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 저주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권적 역사로 ‘너를 통해 뜻을 이룩했다’ 하고 사가랴에게 마침표 도장을 찍으시는 순간인데, 사가랴는 그걸 떼어내 집어던지고는 ‘어떻게?’ 하고 물음표를 찍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도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이 마침표가 돼야지, 물음표가 된다면 생활이 형통하지 못합니다.

입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닫으시면 말 한마디 못합니다. 신앙적인 말을 못 할 바에야 차라리 내가 네 입을 닫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온 형벌이고 심판입니다. 표적을 원했던 사가랴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믿으면 ‘믿음의 표적’을 볼 수 있었지만, 믿지 못하니 ‘믿지 못하는 표적’인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불신앙은 인간이 선에 대한 상태를 죄수처럼 완전히 속박당하는 일입니다. 불신하면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어디 가도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아침 먹으면 저녁 거리가 걱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만나가 내리지만 믿지 못하면 삶이 산산조각 나고 불행해집니다. 형통한 날이 없습니다. 믿으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지만, 못 믿으면 구름이 껴서 어두컴컴합니다. 몸이 무거워지고 앞을 잘 분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불통을 형통으로 만들고, 답답한 것을 환하고 기분 좋고 명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늘 문을 닫고, 동서남북을 닫습니다. 부부 사이도 닫고, 자식과의 관계도 닫습니다. 교회 나가도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몇십 년 믿어도 마음이 답답하고 시원함이 없습니다. 그저 그날이 그날이고 성경 읽어도 성령님이 환하게 눈을 뜨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성경 볼 생각도 없어지고, 어영부영하다가 나이가 40, 50 지나 60이 넘어 죽을 때가 가까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벙어리 생활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아름답고 형통하고 편안하고 안전합니다. 집에 태산 같은 걱정거리가 있다 해도 궁상맞게 걱정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기고 감사, 찬송합니다.

예수님은 내일이면 당신이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시면서도 기드론 시냇물을 찬송하며 건너셨습니다(마 26:30). 역대 신앙의 의인들도 고통을 당해도 찬송했습니다. 찬송 속에 감사가 있고, 감사 속에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밤낮 입이 나와 불평불만입니다. 이것이 벙어리 된 사가랴처럼 ‘닫힌 생활’입니다. 사가랴를 보십시오. 주시는 약속을 무효로 하는 것에 대한 응징이 얼마나 큽니까? 오늘날 우리도 물음표를 달아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징벌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앞을 못 보는 두 사람이 기찻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기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둘이 놀라서 다리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기차는 다른 선로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두 사람에게 말합니다. “아니 왜 그걸 붙잡고 매달려 있습니까?” 알고 보니 다리 아래는 높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도랑물이 흐르고 있고 발이 땅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무리 행인들이 말해도 못 믿고 낑낑거리던 두 사람은 “이제 더 버틸 힘도 없으니 한번 뛰어내려 보자”고 손을 딱 놓는 순간 발이 땅에 닿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아멘”해야 하는데 못 합니다. 의심은 쓸데없는 고통을 안겨 줍니다. 기쁨과 만족과 고마움이 없으니 전부 원수입니다. 잘 사는 사람에게는 ‘네가 언제부터 잘 살았냐?’ 하며 심통이 벌벌해서 시비를 겁니다. 사람에게는 믿음과 의심이 항상 공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말씀을 따라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만 붙잡으십시오! 정(定)함 없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불신은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성경 말씀을 소설처럼 여기게 합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고 했으니 우리 마음 속에 빛이 있는지, 어두운지 살펴봐야 합니다(눅 11:33-36).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고, 예수님 자신이 빛이시니(요 1:4, 8:12) 그 빛으로 우리 삶을 밝혀야 합니다. 빛이 없으면 답답하고 캄캄합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돌이켜 자기 뜻으로 사는 삶은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살겠습니다’ 외치는 독립선언입니다.

그러나 ‘아멘’의 신앙생활은 나의 뜻과 삶을 하나님의 뜻 앞으로 가져갑니다. 내 모든 생각과 뜻과 재주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 점검받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내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자기 자신도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사람은 사방이 꽉 막힙니다. 동을 잊어버리고, 서도, 남도, 북도 다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려고 마침표를 주셨는데, 왜 그걸 떼어버리고 하나님께 물음표를 답니까. 우리 평강제일교회 성도들은 모든 생활에 “아멘!” 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입니다(계 1:6-7, 고후 1:20, 계 22:20).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아멘이 있으면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열려지고

천사가 알려준 대로 사가랴의 아내는 수태했고 때가 되니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과 친족이 모두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낳은 지 8일이 되니 할례를 행하러 올라갔습니다. 친족들이 아이 이름을 아버지 이름을 따서 ‘사가랴’로 지으려고 하자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니다. 요한이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집안에 없는 이름이라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부친인 사가랴에게 물었습니다. 말 못하던 사가랴는 서판(書板)을 달라 하더니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바로 가브리엘 천사장이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가르쳐 줬던 그대로입니다. 10개월 전에는 믿지 못해서 혼이 났지만, 이제는 친척들과 아내 앞에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답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하나님도 기쁘시고, 천사도 기뻐서 그의 닫혔던 입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내 믿어야지, 왜 여기서 돈 꾸고 저기서 돈 꿔서 다 까먹은 뒤에야 뒤늦게 깨닫고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하며 눈물 흘립니까. 하나님이 재물을 많이 얻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 헌금해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 망한 뒤에야 “내가 그때 눈 딱 감고 헌금 드렸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합니다. “그 돈으로 더 많이 돈을 벌어서 교회 바치려고 했다”고 변명합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 있는 재물도 바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 재물을 바치겠습니까.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사가랴의 입이 다시 열리니 아내와 친척, 동료 제사장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다. 사가랴처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표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 돼서 오셨다고 하면 아멘이고, 날 위해서 오셨다고 하면 아멘이고, 나에게 영생을 주러 오셨다 하면 아멘이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실 때 아멘입니다. 열 번 죽어도 주님께서 살리시면 다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는 의심하지 말고 주시는 말씀이 다 여러분 속에서 이뤄져 마침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닫혔던 입이 열렸으니 사가랴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친척들, 조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라. 의심하다가는 나처럼 벙어리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실물 교육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믿지 못하면 하늘 문을 닫아 놓으십니다. 그 순간 머리가 되지 못하고 꼬리가 되고 아래로 쳐집니다. 남에게 꿔주지 못하고 꾸어 먹습니다. 그래서 닫힌 생활에 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친척, 조카들이 사가랴의 말을 듣고 ‘나도 벙어리 되면 안 되지. 그럼요, 삼촌 말 믿겠습니다.’ 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불신하면 사방이 꽉 막힙니다. 인민군 토치카(진지)보다 더 캄캄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믿으면 닫혔던 문이 열려 환해집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닫혔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다니엘이 믿으니 사자가 하품할 정도로 열어 놓으시고, 옥문이 열렸던 것을 보십시오.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네 명씩 나눠 모두 16명이 옥문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첫째문 철커덕, 둘째문 철커덕, 셋째문도 철커덕 열고 베드로를 빼내 마가 요한 다락방에 모여있던 성도들에게 인도하지 않았습니까. 믿는 베드로에게는 열렸고, 믿지 못하던 간수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느 때까지 입이 닫혀진 상태로 있겠습니까? 전도는 입을 여는 생활입니다. 집안에 모든 막혔던 것들이 다 열리는 생활입니다. 답답했던 것이 박카스 마시듯 시원하기 짝이 없어집니다. 그렇지 못하면 여기저기 대출받고 애를 쓰는데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으니 기도가 안 나오고, 기도가 안 되니 찬송이 없습니다. 진땀이 나고 하루만 지나도 옷이 까무잡잡해집니다. 그 모든 것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데 우리 마음과 생활이 지붕을 만들어 복이 내려오려고 해도 내려오지 못합니다(렘 5:25).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답답한 인간들아. 내가 축복을 쏟아주려 해도 너희 머리 위가 다 막혔다’ 하십니다. ‘내가 언제 막았습니까?’ 하면 ‘말씀을 믿지 못한 죄다’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 2부예배 참석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3부예배도 참석해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열려지는 축복이 임합니다. 말씀을 불신하면 닫혀지고, 믿으면 열려지는 것입니다.

제가 1950년 6·25 사변 때 참전했다 총상을 입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 트럭에 15명씩 누워 실려 가는데 여기저기서 나 죽는다는 신음소리가 메아리칩니다. 병원에 도착해도 병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허벌판에 미제 천막을 백여 개씩 쳐놓고 열 사람씩 누워 있습니다.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지만 약도, 간호사도, 위생병도 모자랍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 간호사가 오더니 간절히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기도 소리를 간절히 들었습니다.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옆에는 포탄에 맞아 창자가 밖으로 빠져나온 병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 죽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가 수술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제가 지금 느끼는 것은 그 간호사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가 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환자들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던 그 간호사의 기도. 저의 마음도 뜨거워졌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낫구나 싶었습니다. 한번은 옆에 쳐놓은 가마니를 제치고 보니 진저리를 쳐가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나같이 죄 많은 것이 기도한들 하나님이 듣겠나’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셔서 왔습니다. 환난 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포기한 기도, 지금 이 시간 찾아야 합니다. 몇십 년 전, 몇 년 전, 몇 달 전 포기한 것, 까맣게 잊어버린 기도 오늘 모두 다 찾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시 기도를 시작할 때 반드시 큰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기도가 있으면 열립니다. 믿음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밤낮 닫혀 있습니다. 의심치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반면 의심하는 자는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야고보서 1:6에 기록돼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응답이 있습니다. 소원이 이뤄집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죄의 반대는 선이 아닌,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선의 선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죄와 악이 관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과거에 믿지 못한 것, 잊어버렸던 것까지 다 찾아주십니다. 과거에 잊어버리고 기도 안 했던 것, 실망하고 기도 안 했던 것 다 찾아오십니다. 죄 많은 내가 입 벌리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겠나 하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의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의인으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마 9:13).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과거를 치유하고, 미래를 개방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과거에 잘못한 것 돌아보지 않으시고 다 용서해 주십니다.

항아리에 빗물을 받으려고 밖에 내놓았는데 한 시간 뒤 가보니 한 방울도 안 들어갔습니다. 왜? 뚜껑이 닫혀 있었습니다. 이 시간 말씀 들을 때 제발 불신의 뚜껑을 내 던지고, 자신을 빈 항아리로 놓아두십시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주여,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불초한 남종, 여종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모두 뚜껑을 집어 던지십시오. 여러분이나 저나 믿으려고 애쓸 때 마귀가 우리도 모르게 불신의 막을 가져다가 거미줄같이 쳐놓습니다. 그래서 ‘이걸 시작하려고 하면 될까? 이렇게 하면 밑지지 않을까’ 하는 불신과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배짱이 좋아야 합니다. ‘내가 요단강 물을 밟으면 갈라질까, 안 갈라질까’ 백날 그러고 있으면 안 갈라집니다. 믿음으로 밟으니 요단강이 딱 갈라진 것 아닙니까? (수 3). 그런 신앙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마음에 불신의 장애물을 치우면 은혜가 폭포수같이, 노다지처럼 쏟아져 감당 못 할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늘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대로 승리하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하려고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겉으로 보면 나무 조각, 시멘트, 벽돌, 자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몸’이라 믿고 와서 기도하면 잡념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둠이 올 때 ‘주여 물리쳐 주시옵소서’ 하십시오. 의심나고 답답하고 괴롭고 두렵고 떨릴 때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도망갑니다.

생활 속에 늘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십니다. 마 28:19 이하 볼 때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제발 믿고, 모든 삶에 열려지는 생활을 하십시다. 돈이 쪼들리면 닫혀진 것이고, 여유가 있어 쓰고 남으면 열리는 삶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도 열리는 생활입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하십시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말씀대로 순종해 열매 맺을 때 하나님께서 “평강교회 아무개 권사, 집사야. 내가 너를 통해서 이 말씀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십니다. 그때 “아멘!” 해야지 “어떻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닫혔던 입이 열리니 찬송

사가랴는 닫혔던 입이 열리자 찬송했습니다. 입이 열리면 감사하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찬송이 나옵니다. 감격스런 찬송입니다. 너무 기쁘고 즐겁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만 찬송가를 읽어 보십시오.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찬양하면 첫째, 거룩합니다. 둘째,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좋습니다. 시편에 ‘셀라’ 라는 말이 나오면 그 다음 줄로 넘어가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좋다는 것입니다. “어허, 좋다!” 하는 감탄입니다. 찬양은 진정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찬양이 안 나옵니다. 찬송은 영으로, 진심으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빌려온 찬송’은 없습니까. 찬송 안 하다가, 남이 부르면 ‘빌려와서’ 찬송합니다. 내용도 모르고 입만 벌립니다. 옆에서 보기에는 찬송하는 것 같지만 뜻으로 볼 때는 ‘빌려온 찬송’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기 찬송이 다 떨어졌으니 남의 것 꿔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중에 많습니다. 오늘까지 예수님 믿으면서 정말 감격과 기쁜, 즐거움, 감사 속에 찬송했는지, 빌려온 찬송했는지 돌아보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외상 찬송’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외상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아이고, 네가 언제 믿음의 딸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벙어리 찬송도 있습니다. 뜻도, 내용도 모르고 안 하면 창피하니 그냥 외워서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찬송은 가증합니다. 외식(外飾)하는 찬송은 하나님이 구역질 난다고 하십니다. 그런 믿음 갖지 마십시오. 기도할 줄 모르는 분들은 ‘하나님, 저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저 이 찬송 내용대로 기도 올리겠습니다’ 하고 찬송 부르시기 바랍니다.

중국 마카오에서 술판, 도박판이 벌어지는 와중에 한 청년이 바깥에서 찬송가 230장을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도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찬송가 230장
1. 저 뵈는 본향집 날마다 가까워 내 갈 길 멀지 않으니 전보다 가깝다
2. 내 주의 집에는 거할 곳 많도다. 그 보좌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갑니다.
3. 내 생명 끝날에 십자가 벗고서 나 면류관을 쓸 때가 가깝게 되었네
4. 내 길의 원근을 분명히 모르니 내 주여 길 다 가도록 나 함께 하소서
<후렴> 더 가깝고 더 가깝다. 하룻길 되는 내 본향 가까운 곳일세.

 

청년이 달밤에 하도 열심히 찬송을 부르니 술 마시고 노름하던 이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서른 살쯤 된 미국 젊은이가 일어나더니 “나는 이제부터 도박은 손대지 않겠네” 하며 그때까지 딴 거액을 다 내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찬송을 들으면서 어릴 때 신앙생활하던 추억, 늘 신앙으로 권면하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도박판, 술집에서도 찬송을 불러 회개시켰다면, 여러분도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은혜의 입으로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3천 명이 돌아왔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건강을 주시고, 모든 환경과 조건을 다 주셨는데 왜 전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찬송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찬송은 마음 깊은 데서 샘물 솟듯 솟아나야 합니다. 오늘까지 50년, 60년, 70년 살아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 보십시오. ‘아아, 이래서 집안이 닫혔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가 말을 듣지 않고 속 썩인다면 자녀를 원수로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마침표가 됐는데 다시 물음표로 바꿔 놓았으니,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겠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 오늘 주님 말씀 앞에 마침표가 됐습니다. 절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믿음에 앞장서고, 교회 봉사에 앞장서고, 감사와 헌금에 다 앞장서겠습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69장
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2.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3.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4. 이 땅 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만 부르고 그 뜻을 생각해도 감격스럽고 감사한데 진짜 그 나라에 들어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참된 평화! 주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우시며 말씀한 것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요 14:27) 하셨습니다. 인류에게 이것 하나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하신 영원한 맹세의 약속은 단 한가지, 영생입니다(요일 2:25).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삶, 평화스러운 그 나라, 독사 구멍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 사자와 이리떼와 같이 살아도 평화스러운 그 세계가 약속돼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입니다. 그 뜻이 ‘하나님의 맹약(盟約)’, 즉 맹세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가랴가 불신앙에 대한 형벌로 벙어리가 된 고통에 날마다 괴로워하다가 서판에 “요한”이라고 쓰는 순간, 그 믿음의 순간에 하나님이 기쁘셔서 천사를 통해 빨리 열어주라 하시는 순간, 벙어리에서 해방되고 말을 하게 된 사가랴! 오늘 평강교회가 신령한 뜻으로 꼭 그렇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까지 하늘 문이 닫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개인과 가족과 사업과 교회, 나라, 민족에 다시 열려지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005년 12월 18일 주일 3부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이 말씀은 휘선 박윤식 목사가 심한 대상포진으로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2005년 12월 18일부터 2006년 1월 1일까지 보름 동안 3일간의 특별새벽예배를 포함해 무려 13차례에 걸쳐 설교하신 말씀 가운데 첫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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