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인터뷰 : 말씀의 강물은 어김없이 흘러왔다 – 전극화 장로 1편
참평안은 지난해 휘선(暉宣) 박윤식 목사 성역(聖役) 60주년과 구속사 시리즈 발간 10주년을 맞아 휘선사업기념회와 공동으로 특별 인터뷰를 시작했다. 박윤식 목사 사모 민갑식 여사 (2017년 1월호), 정원식 전 국무총리 (2017년 3월호), 홍순분 전도사 (2017년 6월호)에 이어 네 번째로 평강제일교회 초기 역사의 핵심 증인 전극화 장로를 만났다. 인터뷰 최우선 순위였지만 미국 거주 중이어서 애를 태웠던 전 장로와의 만남은 그가 4년 만에 일시 귀국함으로써 마침내 성사됐다. 그의 육성을 전한다.
구속사(救贖史)와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한 젊은 시절
내 고향은 평안북도 선천군이야. 아버지(전창목 장로)는 믿음이 진실한 분이었지. 유명한 교역자들을 길러낸 선천 성경학교를 졸업하셨고, 땅을 저당 잡혀서 시골(선천군 옆 정주군 옥천면 문인동)에 100명 들어갈 수 있는 교회를 지으셨어. 8.15 해방을 몇 달 앞두고 43세에 이질로 돌아가셨지. 왜정 시대라 약이 없었어. 엄마 혼자 남았지. 아이가 다섯인데 우리 언니는 시집가고 내가 제일 위였어. 집이 어려워지니 나도 일찌감치 19세에 결혼을 했어(1948년).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연세대(당시 연희전문대)에 친구들이 다니고 있다며 학교 가겠다고 서울로 떠났어. 혼자 지내고 있는데 외사촌 언니가 “서울에 이승만 박사가 나왔는데 배급을 준다더라”며 우리도 가자고 하더라고. 용기를 얻어서 외사촌 형제 대여섯이 선천역을 끼고 출발해 개성 끄트머리까지 왔어. 거기서 밤에 높은 산을 넘으니 불빛이 반짝거리더군. 마침 제사를 지내는 민가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서울로 왔지. 그러나 서울에서 갈 데가 있나. 외사촌 언니의 삼촌이 호떡 장사를 한다고 해서 그 집을 찾아가 며칠을 묵었지. 남편을 찾아야 하는데 찾을 길도 없고. 수소문 끝에 겨우 찾았는데 아직 학교에 못 들어갔더라고. 그때부터 둘이 고생을 얼마나 했겠어. 버선발로 나왔으니 신발 한 짝 없었고, 숟가락 하나 못 챙겨 나왔으니. 남편이 호떡 장사도 하고 담배를 말아서 팔기도 했지.
그러다 6.25가 터진 거야. 스물 한 살 때였지. 몇 번을 죽을 뻔했어. 보따리 들고 한강 나왔는데 다리가 끊겨 피난도 못 가고. 빈집에 들어가 하루를 묵고 날이 밝았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을 장악하고 ‘공화국 만세’를 부르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불렀지. 종로서 근처에서 우리나라 경찰관들이 밧줄에 묶여서는 뙤약볕 아래 잡혀있더라고. 그 광경을 보면서 세 들어 살던 집에 돌아왔는데 주인 여자는 피난을 갔고 집에 인민군들이 들어와 옷을 뒤지다가 총을 쏴서 세 사람을 죽여 피가 낭자하더라고. 그걸 본 뒤부터는 참새만 바스락거려도 흠칫 흠칫 놀랐어. 그 와중에 남편은 염병이 걸려서 밤에 나가서 물을 끓여오라는데 무서워서 밖에 나갈 수도 없었지. 9월에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지만 이듬해 다시 1.4 후퇴를 했지. 남편은 병이 나아 제1국민역으로 뽑혀 간 뒤였어. 아기를 데리고 서울역에 가서 피난 열차를 탔지. 돈이 없으니 객실에는 못 들어가고 짐차 맨 꼭대기에 올라타고 부산까지 일주일 걸려서 왔어. 기차가 굴 속에 들어가면 긴긴 시간 동안 시꺼먼 연기가 말도 못했지.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숱했고. 다행히 나는 죽지 않고 부산까지 와서 적기(부산항 인근인 현 우암동, 감만동 일대로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다)라는 데서 피난생활을 했지. 남편은 영어와 일어를 잘하니 시험을 쳐서 미군 통역관으로 동부전선으로 갔어. 나는 적기에서 가까운 수정동으로 옮겨 살았지. 재봉틀을 돌려 아이들 옷 같은 걸 만들어주면서 4년 동안 밥을 벌어먹었어. 전쟁이 끝나고 남편이 김포에 있는 해병대 통역장교로 일하면서 자리를 잡아 나도 서울로 올라왔지.
휘선 박윤식 목사와의 만남
그렇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어. 군인들이 총 맞아 죽은 모습, 옆에서 같이 밥 먹던 사람이 목이 잘려 죽은 모습을 본 뒤로 병이 생긴 거야. 너무 무섭고, 누가 와서 나를 찌를 것 같은 공포심에 밖에 나가지도 못했지. 병원마다 다녀도 약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 ‘믿던 예수나 진실하게 믿어야겠다’ 마음먹고는 기도원에 많이 다녔어. 가서 밤낮 박수치고 그랬지. 약도 안 써 본 게 없었어.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야. 잘 아는 동네 할머니가 오더니 “우리 딸(황보국 권사)이 지금 예수에 미쳤다.”고 해. “왜요?” 했더니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온 목사님이 있는데 그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을 잘 가르친다더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안 가요. 할머니, 나한테 얘기하지 마세요.” 했더니 슬며시 갔다가는 30분쯤 있다가 다시 왔어. “우리 딸이 너 꼭 데리고 오란다.” 그래서 또 절대 안 간다고 했어. 그랬는데 좀 있다 할머니가 또 온 거야. “우리 딸이 너 안 데리고 오려면 나도 오지 말란다.” 하는 거야.
정말 할 수 없이 외투에다 조그만 성경책 하나 끼고는 따라 나선 거야. 황보국 권사가 말씀이 너무 좋고, 내가 병으로 고생하는 걸 아니까 와서 들어보라고 그렇게 강권했던 것 같아. 가보니 거기가 영락교회 다니던 종화네 집이야(서울 후암동 김종화 권사 집. 참평안 2018년 9월호 ‘교회 역사를 찾아서’ 참조). 박윤식 목사님이 삼각산 기도원에서 영락교회 권사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 뒤 내려와서 성경공부 시작하신 지 3일 된 때더라고. (전극화 장로는 이날을 1962년 11월 11일로 기억하고 있다) 권사님들이 한 20명 모여 있었어. 조금 있다가 박윤식 목사님이 오시는 거야. 그런데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내 마음에 ‘에게게’ 했다고. 아주 목사 같지가 않아.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구제품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었는데 그때가 11월인데도 펄러덩 펄러덩거리는 여름 양복이야. 들어오더니 “다 왔느냐?” 고 그래. 내 마음이 너무 차가워져서 속으로 ‘아유, 저 사람 양복이 저러니까 양복 한 벌 얻어 입으려고 왔구나’ 했어. 왜 그 생각이 그렇게 들었나 몰라. ‘저 사람은 목사도 아니다’ 싶었지.
그런데 집을 꽉 채워 앉았으니 나갈 수도 없고, 나는 목사님 바로 앞에 마주 앉게 됐지. 묵도하자고 해서 눈을 감았어.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눈을 감자마자 저쪽에서 빛이 쫘악 하고 들어오는 거야. 놀라서 눈을 번쩍 떠 보니 아무도 없어. 다들 눈 감고 있고. 그런데 계속 빛이 나한테 쫘악 오는데 마음 중심을 흔들면서 가슴이 와르릉 와르릉 대는 거야. ‘도대체 이게 뭐야?’ 싶고 너무 무섭고 이상해서 눈을 다시 감고 무릎을 꿇었어. 그랬더니 박 목사님이 그 때부터 나한테 주목을 하고는 질문을 하더라고. 성경은 뭘 갖고 왔냐고 해. 그래서 신약만 있는 요만한 성경책을 보여 드렸지. 그러니까 신발은 몇 짝 신고 왔냐고 또 물어. 속으로 왜 이런 걸 물어보나 했지. 그랬더니 신발은 두 짝 신고 오면서 왜 성경공부 하러 오는데 구약은 안 가져오고 신약만 가져오느냐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성경 말씀을 대주시는데, 놀랍게도 그 순간에 내 병이 다 나은 거야. 10년을 앓았고 병원마다 다녔던 내 병이 그 순간 싹 달아나고 만 거야. 그 자리에서 내가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몰라. 병이 어디 간지 모르고 몸이 가뿐해지고 날아갈 것 같아. 이 자리가 무슨 자리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나. 나도 정말 놀랐어.
“목사님, 나 살려주고 가세요”
그 자리에서 성경공부를 한두 시간 했어. 주님이 걸어오신 길을 말씀하시더라고. 그 때 내가 깨닫고 ‘이 말씀 듣고 회개하라고 하나님이 6.25때 나를 죽이시지 않았구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했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박 목사님이 시간 다 됐으니 가려고 하셔. 내가 가서 손을 꽉 잡았어. “목사님, 나 살려주고 가셔. 어디든 쫓아갈 테니 나는 못 절대 놓겠소.” 그 순간에 남녀가 어디 있겠어. 절대 놓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하니 목사님이 떠나질 못하다가 잠시 뒤에 “내일 또 올 테니 이 시간에 또 오시라”고 하더라고. 그 약속을 딱 듣고는 보내드렸지. 그 이튿날부터 말씀을 듣기 시작하는데 이런 말씀이 어디 있나 싶고 밥도 못 먹어. 밥알이 들어가질 않아. 말씀이 꿀같이 달다는 뜻을 그때 알았어. “아버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그때 운 것이 일생 운 것보다 더 많을 거야.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그냥 둥둥 떠서 다녔어. 목사님도 그걸 보면서 얼마나 좋았겠어. 일생 목사님과 떨어져서는 못 산다고 내가 아주 꽉 붙잡았지. 목사님이 “이제 살아났으니까 됐다.”고 하시더라고. 그래도 따라다녔지.
조그만 소반을 펴서 촛불을 켜놓고 성경책을 펴 놓고는 3일 동안 꿇어앉아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어. “하나님 아버지, 내가 아버지한테 이렇게 잘못을 많이 했는데, 학교 다닐 때 선생한테 잘못해도 꿇어앉아서 벌을 받는데 나에게 회개할 기회를 이렇게 주셨으니 내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이 정성 조금만이라도 받아달라”고 한 거야. 밤 10시에 꿇어앉게 되면 새벽 5시 새벽기도 끝날 때까지 꿇어앉는 거지. 3일을 계속 하니 요한복음 3장 16절, 4장 41절을 비롯해서 성경 구절들이 내 귀가 뚫어지게 막 들어오더라고. 박 목사님한테 말씀드렸더니 “이제 됐으니 말씀만 받으라”고 하셔. 그런데 그때는 내가 금식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금식이 돼. 밥알이 입에 들어가도 모래 씹는 것 같아서 밥을 먹고 싶지도 않았어. 10일 동안 물 한 방울 안 마시고 잠도 안자도 어디서 기운이 나는지 전부 내 세상이야. 펄펄펄 뛰는 거야. 남산을 바라봐도 귀하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예쁘고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이 말씀을 어떻게 놓치겠어.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지. 감동이 되는 것을 말로 할 수가 없어.
“거지나 다름없었다”
김종화 권사 집을 시작으로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박 목사님이 성경을 가르치셨지. 우리 집에서도 하셨어. 구로동에 있던 박 목사님 단칸방 집에서도 많이 하셨고. 1969년 대방동에 시온산한돌교회를 세우기 전까지 오랜 가정교회 시대가 그렇게 시작된 거야. 우리 집이 노량진 입구의 상도동 전셋집으로 옮겼을 때는 그 집 차고가 숙소가 됐어. 박 목사님도 거기서 주무시고, 여운초 목사님도 거기서 주무시고, 여러 사람이 차고에서 화로를 피우고는 가마니 같은 것 주워다가 깔고 지냈지. 거지나 다름없어. 낮에는 방에 들어와서 성경공부를 하고 밤에는 거기 기거하셨지. 난방은 무슨 난방, 그때 무슨 난방시설이야. 박 목사님 진짜 불쌍해. 불쌍하게 살았어. 밥도 제대로 못 드셨지. 우리가 갖다 드려야 밥을 드시는데 끼니마다 챙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 20-30명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그래도 점심 한 끼는 꼭 해야 하니까. 오전 10시부터 두어 시간 공부하고 나면 계영옥 권사가 밥은 맡아서 했어. 밥을 먹고서는 꼭 한 시간 또 공부했지. 쌀을 소두로 한 말 사 봐야 요만한 사발로 스물 두 사발밖에 안 나오거든. 그걸로 어떻게 매 끼니를 먹어. 우리 사무엘(김사무엘 현 미국 워싱턴DC 믿음제일교회 담임목사) 업고 돈 얻으러도 많이 다녔지. 그런데 누가 돈을 주나. 우리 걸어온 길이 너무 비참했어. 말로 못해. 이게 그렇게 커온 말씀이야. 너무 힘들었어. 말씀이 너무 힘들게 왔어. 너무나 힘들게 왔어. 교회가 이만큼 크기까지 너무 힘들었어. 박 목사님이 얼마나 고생을 했어. 진짜 말씀이니 이렇게 한 거지, 누가 그 고생을 하겠어. 매 맞고, 찢어지고, 정말 힘들게 왔어. 여러분들 정말 잘 믿으세요.
지난날을 회고하던 전극화 장로는 울먹이다 끝내 오열했다. 긴 시간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현장에 있던 모두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내가 쉰밥도 몇 번 드렸어. 있어야 제대로 된 밥을 드리지. 그것도 아끼고 아끼다가. 지금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해. 너무 억울하고 분해. 목사님이 월남하신 직후 서울역 앞에서 빵장사를 하신 적이 있어서 빵을 잘 만드셔. 밥이 없으면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하셔서는 반죽을 해서 빵을 직접 만드셨지. 그리고는 우리한테 빵 먹자고 하셨어. 당장 밥할 쌀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 쌀값도 비싼 시대였고. 배가 고프면 봄나물을 뜯어오기도 했는데 목사님이 보시면 전도하라고 했지 나물 뜯으라고 했느냐고 막 나무라셨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구속사는 이렇게 흘러온 거야. 말씀은 어김없이 흘러왔어. 전에는 우리가 불쌍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말씀을 깨닫고 보니 하나님 아버지가 불쌍한 거야. 숱한 생명 살리겠다고 6천년 넘게 고생하셨으니. 말씀은 이루어지게 돼 있어. 이제 후세대들이 깨닫고 훈련받아야지.
1차 전국 순회전도
어느 날 20명 정도 타는 트럭을 타고 박 목사님과 성도들이 전국 순회전도를 떠났어. 아직 여운초 목사님도 들어오기 전이었지. 그때 우리는 박 목사님이 뭘 하자고 하면 절대 순종으로 받아들였어. 목사님은 당당한 군대 장관 같으셨지. ‘12시 1분 전’이라고 빨간 글씨로 쓴 전도지를 찍고, 집에 있는 제일 좋은 옷들 가져오라고 하셔서 제일 좋은 ‘빌로도’ 치마 같은 것들 가지고서 출발했지. 전라도에서부터 동해안 쪽까지 쭉 돌면서 전도했어. 한 군데 도착하면 두 명씩 열 패로 흩어졌지. 목사님이 전도지를 이만큼씩 주시면서 다 돌리기 전까지는 밥도 먹지 말라고 하셨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고 기도해 주고, 돈이 없는 집에 가면 가져간 옷을 한 벌 주고 기도해 주고 나왔지. 정말 싫어하는 집에서는 먼지 털고 나오라고 하시고.
나와 같이 다니던 처녀는 저녁때 되면 너무 배고파서 못 살겠다고 해. 그러면 근처 교회에 찾아가 전국 순회 전도 나왔다고 하면 시래기국에 밥도 차려주고 그랬어. 서울 올라오다 천안에 도착했을 때는 장터가 있으니 가서 소장수, 닭장수든지 모조리 전도지 돌리라고 하셨지. 얼마나 힘들었겠어. 너무 배고프고 힘들고, 고생 고생하고 원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우리를 다 끌고 가신 거야. 지금 생각하면 훈련을 시키신 거야. 높은 데고 깊은 데고 예수님의 군대 용사가 돼서 어디든 가도록 하는 훈련을 시키신 거지. 남의 집에 들어가도 두려움 없이 들어가는 훈련인 거고. 이 집 저 집 들어가서는 청소 깨끗이 해주고 수도 놓아주고 변소까지 청소하고 나오기도 했어. 그렇게 전도했지. 지금 그렇게 훈련을 시키면 누가 하겠어.
12장로를 장립하다
박 목사님을 만나고 3-4개월 후에 장로로 장립 받았어. 목사님이 열두 사람을 뽑으셨지. 다 여자들이고 대부분 영락교회 권사들이었어. 그 12명 중 김종화,황보국,이인애 권사 등 다른 사람들은 그 후에 ‘권사’라고 하셨는데 나한테는 계속 장로라고 하셨지. “저 전 장로는 감리교에서 왔어” 하면서 그러셨는데, 왜 나만 장로라고 계속 부르셨는지는 몰라. 뭔가 뜻이 있겠지. 죽도록 충성하고 다 바쳤으니 좀 자격이 있다고 보신 건지도 모르지.
그렇게 오랫동안 가정교회 시대가 계속되던 때였어. 성도가 늘어나니 집에서 더 예배를 못 드리고 원효로의 음식점을 주일만 빌려 예배를 드렸지. 어느 날 박 목사님이 나한테 자전거방에 가자고 하셔. 그때 내가 좀 시험에 들어있을 때라 ‘내가 가야 되나?’ 하면서 드러누워 있었지. 말씀은 진짜인데 따라가기가 너무 힘이 드니 여기서 멈춰야 되나 고민하던 때였어. 자신과 싸우긴 했지만 피를 흘리도록 싸우지는 않았던 거지. 그런데 여름인데 이부자리 펴고 누워있는데 목사님이 어떻게 알고 찾아 오셨더라고. 소반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셔. 그러더니 “저 별 세계에서 보면 지구가 바늘로 점 하나 찍은 것보다 작지 않느냐. 또 지구에서 보면 한국이 얼마나 작냐. 그런데 한국에서 전극화라는 사람을 보려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당신을 찾아오셨다. 어떻게 할 거냐. 성도가 우주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고 가시더라고. 그 얘기를 하시는데 내가 얼마나 통곡했는지 몰라. 그때 내가 마음을 먹은 거야. ‘아, 나는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분은 나가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 내가 다 버려야겠다’ 고 결심했지.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죽고, 가진 것을 다 포기하겠다고 마음 먹은 거야. 그때부터 내가 가진 것을 다 팔기 시작했어. 그걸 교회에 헌금으로 드렸지. 그 돈으로 목사님이 대방동에 시온산한돌교회를 지으셨어. 그때부터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거야.
전극화 장로의 일생은 ‘복음에 미친 사람’의 삶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제 정신이 아니다.그러나 실상 복음은 ‘복음에 미친 사람’들에 의해 전진해 왔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정과 생업을 버리고 복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버린 그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평강제일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29년생이다. 수십 년 전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또렷했고, 3시간 가까이 계속된 인터뷰에도 자세가 꼿꼿하고 말에 힘이 넘쳤다. 그는 휘선 박윤식 목사를 처음 만나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하게 된 날을 11월 11일로 기억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역사(歷史)가 ‘참평안’을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된 오늘도 11월 11일이다.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니었다. (12월호 2편으로 이어집니다)
대담, 정리_호준석 기자
사진_하수곤 기자
기록_권오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