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제일교회 역사를 찾아서 3편. 서울 대방동 시온산한돌교회
“하나님 원하시는 참된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1968년 10월 5일 성도 37명이 서울 원효로의 전세 교회(15평 규모, 현재 용산 전자상가 자리)에 모여 박윤식 목사의 인도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써 마침내 가정교회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이듬해인 1969년, 가정교회 시절부터 물심양면으로 교회에 헌신해 온 전극화 장로(1965.8.25 평강제일교회 첫 장로로 임직, 현 미국 워싱턴 믿음제일교회 시무)가 320만 원의 거금을 헌금으로 드렸다. 박윤식 목사가 “어디서 돈이 나서 이렇게 많은 헌금을 드리느냐?”고 묻자 “묻지 말라”고만 답했다. 박 목사는 그 돈으로 서울 대방동의 적산가옥(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살던 주택) 대지 40평(당시 주소 : 대방동 429-4)을 구입해 1층 17평, 2층 17평의 성전을 건축했다. 박 목사가 서울로 올라와 목회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건축한 성전이었다. 마침내 1969년 9월 10일 서울 대방동에 첫 성전인 ‘시온산한돌교회’가 건축됐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오랜 가정교회 시절 좀처럼 늘지 않던 성도 수가 새 성전에서 교회 간판을 내건 뒤 순식간에 100명을 넘었다. 폭발적인 부흥의 신호탄이었다.
성전 건축은 오랜 눈물겨운 기도의 결실이었다. 1960년대 초반 박 목사와 민갑식 사모, 그리고 이인애 권사 등 2명의 성도가 모여 성전 건축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살아계신 하나님, 비록 저희들의 숫자는 네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신앙적 고난이 오더라도 불초한 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주의 참된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주님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드렸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 “금식기도하며 눈물겹게 새벽마다 기도하며 흘린 눈물을 하나님만 아실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응답이 바로 시온산한돌교회였다.
“앞으로는 내 얼굴 못본다”
박 목사는 이 시절 한 달에 한 주씩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집회를 열어 ‘알아야 산다’, ‘초림과 재림’, ‘진리와 말씀’, ‘성전’, ‘삼일길’ 등의 제목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이때 수많은 일꾼들이 구속사(救贖史) 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30대 초반이던 홍순분 성도(이후 전도사 임직)도 그중 하나였다.
“그날이 1970년 7월 9일 목요일이야. 11시 예배가 있는 날이지. 아직 사람들 오기 전인데 내가 일찍 갔지. 그 통이 좁은 길을 세 살, 여섯 살 두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는데 박윤식 목사님이 꼭대기에서 딱 내려다보고 있는 거야. 싱긋이 웃으시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하시더라고. 응암동에서 왔다고 했더니 응암동에도 교회 많은데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하시고. 그래서 “말씀이 좋으니까 왔죠.” 했어. 그랬더니 좋으셨는지 웃으시더라고. 거기가 대방동 시온산한돌교회야. 정말 조그만 집이지. 박 목사님이 칠판 하나 놓고 성경을 가르치셨지.”(참평안 2017년 6월호 홍순분 전도사 인터뷰 중)
당시 박 목사의 성경공부는 한번에 3시간씩 오전,오후,저녁 3번에 걸쳐 하루 종일 이어지는 마라톤 강의였다. “예수님 잘 믿으면 죽지 않고 영육이 변화한다” (고전 15:51)는 변화의 말씀을 증거했다. “말씀을 열심히 듣는 모습이 대견하셨는지 목사님이 한번은 중국집에 네댓 명을 데려가셨어. 거기서 우리한테 “막차 잘 탔다. 앞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내 얼굴 못 본다” 하시더라고. 그때는 그냥 내가 초보 신자니까 목사님이 저런 말씀하시나보다 했어. 또 한 번은 “지금 몇 사람 안 보이지만 앞으로 하루에 10만 명씩 몰려온다”고도 하셨어. 치마저고리 입은 촌스런 할머니들 열댓 명 앞에 놓고서는 ‘열방이 몰려온다’는 말씀을 그때부터 하신 거야.” (홍순분 전도사)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워서
구속사 운동의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일화들이 이 시절 탄생했다. 박윤식 목사가 훗날 설교 중 여러 차례 회고한 김홍옥 권사는 당시 부산에 살고 있었다. 전국을 돌며 전도하던 여운초 목사가 몇 사람을 전도했으니 부산에 내려오시라고 박윤식 목사에게 전갈을 넣었다. 박 목사는 ‘12열차’(서울에서 부산까지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하루 7시간씩 성경을 가르쳤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땀을 흘려가며 성경을 가르쳤는지 하루 두세 번 옷을 갈아입어야 할 지경이었다. 말씀에 매료된 성도들은 화장실 가는 시간에 말씀을 놓칠까봐 화장실을 못 가다가 공부를 중단시키고 함께 화장실에 갈 정도였다. 당시 박 목사가 부산에서 처음 만난 성도가 40대였던 김홍옥 성도(이후 권사 임직)였다. 북한 출신으로 부산에 정착해 여유 있게 살던 가정이었다. 그녀의 집에 수십 명씩이 모여 박 목사에게 성경을 배웠다. 박 목사는 김 권사에게 “새벽예배 드리러 나가기 전 성경 20장씩 읽고 나가보라. 80세가 넘어도 눈이 절대 흐리지 않고, 총명하고 건강해진다.”고 권면했다. 김홍옥 권사는 40년 넘게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그 결과 80세가 넘어서도 안경을 쓰지 않고 성경의 관주(본문보다 작은 글자로 기록된 주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후 한때 서울로 상경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김 권사는 2006년 평강제일교회 하계대성회에서 방영된 영상 인터뷰에서 “1년에 신구약 성경을 16번 넘게 읽는다.”고 말해 성도들을 놀라게 했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두려움과 걱정,염려가 사라지고 자신이 생기면서 눈뜨나 감으나 감사밖에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교회를 위해 큰돈을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을 하기도 했다.
새 성전의 토대가 된 ‘블루 다이아몬드’
부산의 대표적 향토기업인 성창합판(편집자 주: 성창합판은 부산외대 설립자인 고 정태성 장로가 1930년대 설립한 기업으로 이후 ‘성창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창합판은 1956년부터 부산 적기(赤崎, 현 우암동)에 자리잡고 있었다)과 동양모직 등 굵직한 기업가 일가도 전도돼 박윤식 목사에게 성경을 배웠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자꾸 입에서 “적기, 적기”하는 말이 나와요. ‘참 이상하다. 적기라는 동네에서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싶어서 사람들에게 ‘적기라는 동네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저 시골에 적기라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가보니 온통 배추밭, 보리밭에 거름 냄새만 나요. 그런데 저 멀리에 큰 공장 하나가 보이더라고요. 지나가던 사람에게 “저건 무슨 회사예요?”했더니 “성창합판 아녜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산으로 와서 성창합판 사장 댁을 찾아간 거예요.” (참평안 2016년 3월호 여운초 목사 인터뷰 중)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성창합판 가(家)에서 “이걸로 땅을 사 교회를 지으시라”며 박윤식 목사에게 5캐럿 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를 드렸다. 젊은 박 목사는 그 보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짐작하지 못한 채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 옆에 있던 유명한 보석상에 가서 팔려고 했다. 그런데 물건을 본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검은 지프차에서 내려서는 서울역 뒤에 있던 검찰,경찰,헌병대 합동수사본부로 박 목사를 연행해 갔다. 잠시 뒤 나타난 검사는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목사입니다” 하자 “어디서 이렇게 귀한 보석이 났느냐?”고 캐물었다. “헌금으로 들어온 것이라 팔아서 교회 지으려고 했다.”고 하자 검사가 “이 사람들아. 목사님을 왜 여기 데리고 왔어?”라고 주위를 나무라며 박 목사를 내보내줬다. 결국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는 박윤식 목사를 만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있던 라이온스 호텔(당시 서울 충무로 소재) 사장 부인에게 250만원에 팔렸다. 거액이지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이 돈이 1971년 헌당되는 서울 신림동 소재 일석교회 건축의 종잣돈이 됐다.
비좁았던 대방동 시온산한돌교회에는 박윤식 목사가 혼자 간절히 기도할 만한 기도의 골방이 없었다. 마침 성전을 짓기 전 부지 한켠에 있던 개집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가 앉을만한 공간이었다. 박 목사는 개집의 지푸라기를 긁어내고 담요 한 장을 깐 뒤 이곳에서 1주일 이상 성전 건축을 위해 몇 시간씩 기도했다. “좀 답답하지만 기도하기에는 천국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간절히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블루 다이아몬드를 주셨다. 개집도 기도처가 돼서 기도하니 이런 복을 받았구나 싶어서 하나님께 뜨겁게 감사드렸다.”고 회고했다.
“언제 옹달샘을 가시려나”
블루 다이아몬드를 구입해 준 라이온스 호텔 사장 부인이 전도된 사연도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전도하러 나가면 막막하죠. 우선 문을 두드리면서 물 좀 얻어마시겠다고 말하고는 들어가서 전도를 했어요. 한번은 서울 어느 미장원 옆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라이온스 호텔 사장 집은 김장을 트럭으로 할 정도로 부자인데 그 집 부인이 갑상선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얘기들을 해요. 그래서 박윤식 목사님한테 “그 집에 전도하러 가고 싶은데 가서 뭐라고 얘기를 할까요?”하고 상의했어요. 그랬더니 “가서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옹달샘 물을 먹고 바르면 낫는다고 해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라이온스 호텔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직원들한테 사모님이 어디 계시냐고 했더니 뒤로 가면 집이 있다고 가르쳐 주더라고요. 가서 사장 부인을 만났어요. “갑상선으로 몸이 아프시다는데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대요. 그걸 마시고 바르기만 하면 낫는대요.”했더니 그분이 금일봉 봉투를 하나 만들어서는 따라 오시더라고요.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 금방 따라올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죠. 그때가 우리 교회가 대방동에서 70명 정도가 끼어서 앉는 성전에 있을 때에요. 갔더니 박 목사님이 칠판에다가 글씨를 써가면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 부인이 성경공부를 한참 들으시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언제 옹달샘을 가시려나.’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죠. 그런데 그 부인이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전도사님, 어디서 이런 향수 냄새가 나요? 이건 세상에 없는 향수 냄새예요.” 그분 집에 가보니 세계에서 유명한 온갖 향수가 다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교회 와서 ‘향수 냄새’를 맡고서는 갑상선이 싹 나은 거예요. 그 뒤로 박 목사님한테 보통 지극하게 한 게 아니었죠.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가셨어요.” (참평안 2016년 3월호 여운초 목사 인터뷰 중)
구속사 시리즈 초고를 먼저 본 주인공
명지대 설립자이자 1975년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지낸 유상근 박사(1922-1992)도 이 무렵 박윤식 목사를 만나 성경을 배웠다.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교회에 나와 새벽예배를 드리고 박 목사에게 성경공부를 했다.
“나는 성경 1천독을 하셨다는 유명한 박윤식 목사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설명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박 목사님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하루에 2시간씩 지도를 해 주시기로 하셨다. 특별한 배려였다. 주석책까지 내신 박식한 목사님의 개인지도는 내게 귀한 진리의 세계를 끝없이 열어주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달고 오묘했다. 이렇게 2년 동안 꾸준히 공부한 것이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성경연구를 하게 했다.”(1990년 5월 23일 국민일보에 실린 유상근 명지대 총장 (당시) 회고록 중)
그가 언급한 ‘주석책’이 바로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 초고이다.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원고를 직접 본 유상근 박사는 초고를 교정하고, 서명도 남겼다. 그는 정월 초하루에 “대통령에게 세배하러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세배 드리겠다”며 박 목사를 찾아오는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나오면 새벽이고 밤이고 박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유상근 박사는 연하의 박윤식 목사를 스승으로 모셨고, 박 목사는 “유상근 박사님이 내 마음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유상근 박사님은 박 목사님을 만나면 절대 그냥 보내드리지 않고 시내 다방에라도 모시고 들어가서 성경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그러고는 쫑긋 세운 귀를 박 목사님 입 쪽에 대고 자꾸만 다가앉을 정도로 말씀을 사모했다.” (당시 시온산한돌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최완규 장로 (현재 미국 올랜도 푸른동산교회 시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성도들의 헌신도 있었다. 박 목사는 훗날 이들을 가리켜 “눈물 날 수 밖에 없는 성도”라고 말했다. 1주일에 서너 번씩 철야기도를 드리고, 새벽예배에도 빠지지 않으며, 괴로움과 고달픔을 함께 하면서 교회를 섬기던 네 여종이었다. 바쁜 생활 속에 남편을 섬기고 아이들 학교 보낸 뒤 시간만 있으면 낮에도 교회 와서 기도하고 가고, 충성스럽게 봉사하던 이들이었다. 오라는 데가 없어도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어느 교회 집사인데 교회 좀 나오시라”고 전도했다. 문전박대 하는 사람도 있지만 들어오라고 해서 얘기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40명 가량이 전도돼 교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박윤식 목사는 “지금도 눈물겹게 그 성도들을 기억한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고 기도하시고 교회에서 늘 주무시다시피 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겁니다’ 라고 말해줬다.”고 회고했다.
목회자 340명이 모인 청평 대집회
성전 건축 직전이었던 1968년 7월에는 청평에서 대집회가 개최됐다. 무려 340명의 목회자가 참석했다. 박윤식 목사는 아직 젊고, 작은 교회의 목사에 불과했지만 각 교단의 총회장, 노회장을 지낸 목회자들이 대거 집회에 모여들었다. 이미 교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박 목사의 말씀의 능력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 밤나무가 울창했던 청평 강가의 유원지에 대형 천막을 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집회가 계속됐다. 세끼 식사와 수박, 참외 같은 간식까지 제공하며 말씀을 가르쳤다. 유상근 박사가 명지대 버스 7대를 동원해 각지에서 모이는 목회자들을 실어 날라줬다. 유 박사 자신도 찾아와 같이 머무르면서 아침이면 참석한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비타민을 나눠주며 “박 목사님은 멀리 돌아가지 않고 빨리 가는 지름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 집회에서 이미 박윤식 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족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아담부터 예수님까지의 연대를 비롯한 구속사의 족보를 목회자들에게 가르쳤다. (다음 호에 계속)
글_호준석 기자
*4,5편은 추후 계속 연재될 예정이며, 아래 관련기사로 링크한 홍순분 전도사 등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당시의 교회 역사를 미리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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