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제일교회 역사를 찾아서 2편. 1960년대 선교 활동 시대
영혼 구원의 일념 안고 서울로
박윤식 목사는 영혼 구원의 일념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했다. 첫 거처는 영등포 근처 양남동이었다. 동마산교회 부임 전인 1956년 사모인 민갑식 여사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방세가 없으니 처음에는 다리 밑에 가마니를 치고 지냈다. 그 후로는 공장 기계 옆에 있는 한 칸짜리 방으로 옮겼다. 부엌이 따로 없는 단칸방이었다. 부인은 아침 6시면 나가서 서울역 전차길 공사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왔다. 박 목사는 서울 곳곳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교회도 수없이 찾아다녔다. 성도들의 영혼을 책임진 목회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알던 사이인데도 뭘 얻으러 온 줄 알고 노회 가야 한다며 급히 외출하는 이들도 많았다. 차비 5원이 없어서 영등포에서 청량리까지 한강을 건너 걸어가기도 했다. 옷이 땀에 젖으면 헌병 검문소가 있던 한강변에서 옷을 빨았다. 모래밭에 널어놓으면 20분이면 말랐다. 옷은 다 떨어진 군복이었다. 엉덩이 쪽에 구멍이 나서 군복과 비슷한 색의 가로수 이파리를 따서 가려야 했다. 겨울에도 겨울옷이 따로 없어 테트론(한복 안감으로 쓰는 얇은 혼방 옷감) 옷을 입고 다녔다.
영등포시장 로터리에서 양남동 가는 길목에 남도극장이 있었다. 극장 옆은 선술집 골목이었다. 갈비 한 대를 25전씩에 팔았다. 가족이 늘 배를 곯았던 박 목사는 술꾼들이 먹다 팽개친 갈비뼈를 주우러 이곳에 가기도 했다. 수돗물에 씻어 무 한 개 썰어 넣고 밤새 끓여 국물을 먹었다. 어느 날은 갈비뼈를 줍다가 선술집 종업원에게 발길로 엉덩이를 차였다. 얼마나 아픈지 앞으로 고꾸라져 이마를 찧었다. 보다 못한 주인 아주머니가 오죽하면 그러겠느냐고 종업원을 말리기도 했다. 너무 지치고 배가 주려 길거리에 앉아 있으니 대방동의 ‘대성관’이라는 중국집 주인이 측은히 여기고 짜장면과 우동을 대접하기도 했다. 사장은 중국인, 부인은 한국인인 식당이었다. 박 목사는 신세 진 것을 잊지 못해 노량진에서 목회하던 시절 교역자들과 함께 대성관을 여러 번 찾아가 음식을 팔아줬다.
가정교회의 시작
말할 수 없는 고초 속에 마침내 교회 개척의 전기가 찾아왔다. 박 목사는 때로 삼각산(북한산의 다른 이름) 부흥회에 찾아갔다. 부흥회가 끝나면 집회에 찾아온 사람들이 개울 골짜기마다 모여 밥을 지어 먹었다. 할머니 셋이 모여있는 골짜기에 박 목사가 찾아가 밥 지을 나무를 해다 줬다. 그들이 “젊은이는 은혜 받으러 왔소?” 하며 밥 한 그릇을 대접했다. 대화가 시작됐다. 그중 한 사람은 방언받기 위해 기도하러 온 지 40일이 됐는데 아직 방언은 못 받았다고 했다. 박 목사가 “걱정 말라”며 성경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눈이 둥그래졌다. 서울의 유명한 교회 권사들로, 성경도 공부할 만큼 한 이들이었다. “젊은이가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많이 아느냐?”며 박 목사를 붙잡았다. 박 목사가 “여기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집에 가서 성경을 공부합시다.” 하자 그날로 산을 내려왔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세 사람이 수요예배 드리러 가서 20여 명을 모았다.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김종화 권사였다. (전극화 장로는 또 한 사람은 ‘미정 엄마’라고 기억했다.) 남산 자락 후암동에 있는 김 권사의 집에서 성경공부가 시작됐다.
소문이 나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넓지 않은 적산가옥(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지어서 살던 집)이지만 빼곡하게 채우면 100명 이상 들어가는 집이었다. 마루,안방,건넌방,웃방까지 터서 사람들이 끼어 앉았다. 김 권사의 남편은 자기 집에서 성경공부가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 남편이 9시에 출근하고 나면 사람들이 모여 오후 3시까지 공부하고 돌아가고, 김 권사는 부랴부랴 집을 청소한 뒤 퇴근하는 남편을 맞았다. 하루는 남편이 고급 라이터를 가지러 집에 돌아오는 통에 박 목사가 작은 연탄광에 몸을 숨기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민이 ‘수상한 청년이 사람들 모아놓고 뭘 가르친다’며 간첩신고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성경공부 끝난 뒤 성도들과 함께 냉면을 먹던 박 목사가 ‘가슴이 뛴다. 누가 잡으러 올 것’이라고 하자 다들 믿지 않았는데 잠시 뒤 신고를 받은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별 일은 없었지만 모여 있던 이들은 ‘이분이 진짜 능력의 종이구나’ 하고 놀라기도 했다. 김종화 권사 집에서의 성경공부는 6개월 동안 계속됐다.
본격적인 가정교회의 형태로 예배를 드린 것은 2년가량이 더 흐른 뒤였다. 장소는 서울 대방동 해군본부 맞은편에 있던 전극화 장로(현재 미국 워싱턴 믿음제일교회)의 집이었다. 전 장로는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후암동 김종화 권사의 집에서 박 목사를 처음 만났다.(1962년 11월 11일)
“내심 ‘젊은 목사가 알아야 얼마나 알겠나. 양복이나 한 벌 얻어 입으려는 수작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데 가슴에 드릴 소리 처럼 ‘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가슴을 뚫고 빛이 임하는 것 같았다. 놀라서 회개하고 은혜를 받았다.”(전극화 장로)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서울 곳곳의 성도들의 집을 전전하며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방세가 없어 지하 차고에서 가마니 서너 장을 펴고 연탄을 피우며 기거하기도 했다. 아침 9시 반이면 모여서 오후 3시반, 4시까지 성경공부가 계속됐다. 주부들은 빨리 돌아가 가족들 저녁 준비를 해야 하니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성경공부에 몰두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다 찾아왔다”
홍제동의 성결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30대의 여운초 목사가 합류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한 교인이 ‘산상기도를 오래 해 은혜가 충만한 목사님이 있다’고 하는 말에 교인을 빼앗길까 봐 그와 함께 박 목사를 찾아왔다. 수색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박 목사는 대뜸 “전도사구만. 성경 몇 번 읽었어?” 물었다. “몇 번 안 읽었습니다.” 하니 “전도사면 1년에 성경 7-8번은 봐야지. 신구약 성경 가져왔어?” 했다. 신약성경만 가져왔다고 하자 “전도사는 시장 가서 고무신 살 때 한 짝만 사나? 신구약 성경구절 31,094절이 다 짝이 있는데” 하며 성경 어디어디를 찾으라고 했다. 잘 못 찾으니 야단을 쳤다.(참평안 2016년 3월호 여운초 목사 인터뷰 중) 박 목사에게 성경공부를 하며 은혜를 받은 여운초 전도사는 섬기던 교회 목사님을 설득해 박 목사 초청집회를 열었고 급기야는 ‘내가 이분을 도와드려야겠다’고 마음 먹고 교회에 사표를 냈다. 신학교 동창인 다른 전도사 7명도 말씀을 듣더니 여 목사를 따라 나섰다.
김종화 권사, 전극화 장로, 이범례 전도사, 이정희 권사, 동마산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 박 목사를 만난 이인애 권사 등이 당시의 성도들이었다. “박 목사님은 밤이면 기도원에서 기도하시고 낮에는 효자동에 있던 내 동생네 집으로 오셔서 성경을 가르치셨다. 그러면 그 자리가 부흥회가 됐다. 일단 성경공부를 하고 가면 그 사람들을 통해 다시 몇 사람이 전도돼서 오고, 줄에 줄을 이어서 왔다. 그 뒤에는 전극화 장로님 댁에 아침마다 모여 성경공부를 했다. 정말이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다 와서 듣고는 성경 말씀을 사모해서 모이고 또 모였다. 그렇게 공부하고 나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쌀을 가져와서 같이 밥도 지어먹고, 또 은혜를 받았으니 산에 가서 철야기도 하고, 그리고 아침이면 또 모여서 성경공부 하고. 정말 그 때 은혜 받은 건 말로 다 표현을 못한다. 그때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청년들이 몇 있었는데 그렇게 총명할 수 없었다. 다들 성경에는 도사가 됐었다.” (참평안 2008년 12월호 이인애 권사 인터뷰 중)
전국을 누빈 사도들의 행전(行傳)
박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뒤에는 나가서 전도를 하도록 시켰다. 서울 전차요금이 5전이던 시대였다. 전도사들은 어찌 어찌 전차요금을 구해와서는 그것만 들고 나가 전도를 했다. 박 목사는 매일 어떤 사람이 어떻게 전도돼 오나 하고 기대했다. 한번은 전도사 한 명, 집사 한 명씩 짝을 지어 15명이 전국 전도 여행을 떠났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전국으로 나갔다. 박 목사님은 서울에 남아 전도를 하셨다. 목사님이 전도 결과를 너무 궁금해 하니 엽서에 어디서 어떻게 전도를 하고 있고 누구를 만났다는 내용을 적어서 수시로 서울로 부쳤다. 어떤 분들은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오늘도 또 걷고 있습니다.”라고 써서 보내기도 했다. 15명이 전국을 돌다가 몇 월 며칠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모이자고 해서 모인 적도 있었다.”(여운초 목사)
훗날 박윤식 목사는 “누가 뭐래도 여운초 목사의 눈물과 피와 땀을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1년 365일 어떤 일이 있어도, 몸이 아파도 다리를 질질 끌고 피를 토하고 콧물을 흘리면서도 전도하러 나가는 분이었다. 그분이 우리 교회를 이렇게 부흥시켰다.”고 회고했다. 이리에는 전도된 교인 5명이 살고 있었다. 신실하게 믿는 성도들이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이리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박윤식 목사는 여관에 묵을 돈이 없어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이리 역전에서 큰 단지에 죽을 쒀서 파는 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집회가 끝난 뒤 십여 명의 성도가 모인 자리에서 박 목사가 “앞으로는 나 만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자 “왜 그러느냐?”고들 물었다. 박 목사가 “성도들이 많아질 텐데 내가 어떻게 여러분만 붙들고 있겠느냐”고 하자 모두들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박윤식 목사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기차 전도여행을 6개월에 걸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차표값이 제일 싼 경부선 완행열차를 ‘12열차’라고 불렀다. 정거장마다 정차해 12시간 걸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아침 6시에 서울역을 출발하면 저녁 6시에 부산에 도착했다. 딱딱한 나무 의자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열차였다. 승객들은 시커먼 보자기에 도시락, 감자 찐 것, 계란 삶은 것을 싸와서 대전 쯤 지나면 먹었지만 박 목사는 군침만 삼켰다. 그래도 옷만은 깨끗한 양복을 입고 1등칸부터 3등칸까지 오가며 전도지를 나눠줬다. “거지같이 하고 전도하면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전도지를 나눠주며 “이게 하나님의 편지고 천당 가는 표입니다. 찢거나 팽개치면 자손만대 저주 받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차마 팽개치지 못하고 손에 쥔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와 믿는 사람도 많았다. 박 목사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전도지를 만들어 고무도장을 찍어 나눠주기도 했고, 약장수처럼 꽹과리 치고 북을 치며 깃발을 들고 노방전도를 하기도 했다. “안 해 본 것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일간지에 광고를 내 ‘복음전도대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신문 광고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광고의 수단이던 시대였다. 1967년 기독교복음협회 명의로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등에 실린 광고는 “만 17-40세까지의 신앙이 돈독하고 복음전도의 사명을 가진 자를 모집해 3주간 성경을 강습하고 복음전도 순회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광고를 듣고 찾아온 사람 중에는 22살이던 최완규 장로(현재 미국 올랜도 푸른동산교회 시무)도 있었다.
“지인이 ‘네가 관심 있을 만한 광고가 있다’며 신문 광고를 가지고 왔다. 한달음에 찾아갔다. 내가 1호였다. 이범례 전도사님이 ‘7월 10일에 모이면 된다’고 하더라. 광고에는 3주간 강습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청계산 기도원, 춘천 공설운동장, 가평군 현리 냇가 등으로 옮겨 다니며 두 달가량 성경을 배웠다. 모두 323명이 과정을 마친 뒤 차비만 받고 전국으로 전도 활동에 나섰다. 나중에 돌아온 것은 나 하나였다.”(최완규 장로)
박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를 다니면서도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년에 10개월 이상 남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기도 했다. “머리카락에서 땀이 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다.”고 그는 말했다. 박 목사가 기도하던 기도처에 올라가려면 남산 자락에 있던 숭의전문학교에서 문을 열어줘야 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이 박 목사에게 말씀을 배운 뒤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며 박 목사를 도왔다. 주일에는 원래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주중에는 박 목사에게 성경을 배웠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박 목사는 1966년 숭의여고 학생 여러 명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훗날 평강제일교회 전도사로 헌신한 조춘자 전도사도 그들 중 하나였다.
“고기국에서 왜 단맛이 나지?”
궁핍함은 계속됐다. 가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헌금이 2천원도 안 나왔다. 여운초 목사와 이범례 전도사는 지하 차고에서 밥을 지은 뒤에는 연탄을 아끼려고 연탄불을 껐다. 점심은 못 먹고 하루 두 끼씩만 먹었다. 하루는 다들 허기가 져서 큰 마음 먹고 내장을 두 근 사와서 끓였다. 내장은 고기의 반값이었다. 8명이 함께 먹으려고 물을 많이 붓고 푹 끓였다. 이범례 전도사가 부엌에 들어가더니 내장국에 미원을 쳐서는 내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 그런데 식사기도를 한 뒤 숟가락을 들었는데 국에서 단맛이 났다. “왜 이렇게 달지?” 하자 옆에 있던 전도사가 “목사님이 고기국물을 드신지 오래 돼 게걸이 나서 단 맛이 나나보다”며 농담을 했다. 알고 보니 이 전도사가 미원인줄 알고 사카린(당시 설탕 대용물)을 친 것이었다.
“먹지 못하고 국물을 물리는데 눈물이 났다. 물로 씻어 다시 끓였지만 먹을 수가 없어 결국 다 버렸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고기를 먹으려 했으니 너 아직 때가 멀었다고 스스로 자책했다.” (휘선 박윤식 목사)
박 목사의 성경공부가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교회 건물이 없으니 오래 남는 성도는 많지 않았다. “말씀이 좋아 은혜는 받는데 교회가 없으니 계속 다니지는 못하겠다”며 가는 이들이 많았다. 박 목사를 아끼던 강신명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듯 목회도 교회가 있어야 된다.”고 충고했고, 한 목회자는 “여보, 교회도 없이 노친네들 데리고 무슨 일을 하겠어?” 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목사는 “우리가 하나?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는 거지.”라고 답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을 그는 믿었다. 교회에는 큰 건물, 많은 교인, 풍족한 예산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 예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몇 년에 걸쳐 가정교회를 전전하던 끝에 마침내 1968년 10월 5일 서울 원효로에 15평의 전세 교회(현재의 용산 전자상가 자리)를 얻어 창립예배를 드렸다. 장년만 37명의 성도가 참석했다. 박윤식 목사는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설교를 했다. 아직 첫 성전은 건축되지 않았지만 가정교회를 떠난 첫 예배였다. (다음 호에 계속)
글_호준석 기자
* ‘참평안’과 휘선기념사업회는 동마산교회, 시온산한돌교회, 일석교회 시절의 사진이나 자료를 소장하고 계신 독자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사진은 스캔 후 원본을 곧바로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