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난주간 (2009년 4월호)
나의 고난주간
2009년 고난주간 특별성회가 실시된다. 일 년 중 많은 절기가 있지만 고난주간 특별성회는 나에겐 특별한 추억이 있다. 아니, 특별한 추억만들기가 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청년3부 요셉선교회 홍미례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내야 하는지, 부활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형식상으로라도 우리 성도들은 출제빈도가 높은 시험문제의 모범답안처럼 잘 알 수밖에 없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또 듣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제가 들은 바대로 일일이 그 의미를 되짚는 것은 오히려 미련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 모범답안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기에 더군다나 그렇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저보다는 치열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고 준비하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만큼 제 자신은 못나디 못나게 참으로 볼품없이 야윈 나무처럼 이 길 위에 서 있다. 한 가지 정중히 덧붙일 것은 언젠가 제가 소속한 기관의 주보에 ‘신앙인으로서의 고독’에 대해 글을 썼을 때 많은 분들로부터 미혼여성으로서의 고독으로 오해를 받아 위로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것은 글을 읽는 분의 잘못이 아니고 글쓴이의 무능함이 입증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작은 글을 통해 은혜의 공감이 있기를 먼저 기도한다.
매년 사순절이 시작되면 금식이나 새벽기도를 작정한다든지 언행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든지 행보를 삼간다든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올해도 별다를 것 없이 사순절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저는 사순절 시작 이틀 전에 늘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사소한 일로 갈등이 있어 감정을 다치고 말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우리는 서로 유치찬란하게 감정대립의 날을 꼿꼿하게 세우게 된 것이다. 언제 우리가 우정과 우애를 나눴고 생일밥을 따뜻하게 같이 먹었고 잘 통하는 꿈같은 대화를 나누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던가 하는 것들은 순간에 깃털처럼 가볍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어떻게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 끈끈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저의 일상을 적는 수첩에는 ‘우울한 사순절 시작’이라는 글귀가 쓰였고 그런 가슴으로 저는 청평과 여주 연수원에서 열린 워크숍과 기도회를 다녀왔다.
참 이상했다. 다른 때는 직장에서든 개인적 관계이든 좋지 않은 감정을 오래 품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긍정적으로 소화해 버리거나 잊어버리는 편인데 이번엔 달랐다. 시간이 갈수록 서운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아주 작은 티끌이 눈에 들어가 눈동자를 껄끄럽게 하는 것처럼 기도를 해도 성경을 읽어도 맘이 편치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슬픈 부끄러움은 왜 그렇게 맵고 짜게 저를 괴롭히던지 입맛을 잃을 정도였다. 제 자신은 이런 일을 바람처럼 그냥 지나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다. 왜 이런 시나리오 속에 내가 갇혀야 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가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람 관계 때문에 스스로 이렇게 피곤해질 줄 몰랐다. 그것도 사순절에 말이다. 단순히 잠시 삐걱이는 인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중심에 지나치게 인간적이고 사사로운 모습으로 철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제 자신이 얼마나 밉고 싫었는지 모른다.
아아… 그렇구나. 인간적으로 행복하겠다는 생각마저 버려야겠구나.
지하철을 타고 퇴근을 하다 관찰하게 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지하철 칸칸마다 터진 비닐포장에서 밀려나온 순두부처럼 한꺼번에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저 사람들의 삶의 구심점은 무엇일까. 저들 사이에서 함께 한 덩어리의 순두부처럼 엉켜 있는 나는 저들과 무엇이 다르고, 다르다면 그걸 어떻게 확증할 것이며, 확증이 있다면 나의 삶은 저들과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 … 인간적으로 행복하겠다는 생각은 절대로 버려야겠구나. 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제 안에 철기둥처럼 버티고 있던 아집과 고집과 욕심의 한 꺼풀이 스르르 벗겨지는 듯했다. 마음이 아팠다.
세상을 향한 사랑, 인간적인 사랑, 나의 자존심이나 허영심을 위한 사랑, 제 자신이 알아서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제 자신이 미련이 많아서 버리지 못하니 잃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잠시 틀어졌던 우리는 서로 예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 달라졌다. 원하지 않는 성분을 낮춘 저지방 우유나 저칼로리 커피처럼 불필요한 감정과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던 것이 줄어들면서 습관적인 편안한 관계에서 예의와 담백한 긴장감을 갖추고 대하게 되었다.
다시 찾아온 고난주간이다. 밤중에 창문을 내다볼라치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십자가가 도시의 어둠을 밝게 밝히고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를 외치고 있다. 이렇게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물결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계신다. 완전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의 주간은 언제쯤 도래하는 것일까요. 말이나 이런 글도 필요 없고 오로지 말씀과 영으로 통하는 세계, 우리에게 습관화되어 있는 죽음이 스스로 피해 가는 세계가 참 그립다.
이번 고난주간, 저의 소원은 습관적인 시간이나 마음, 피상적인 눈물, 통상적인 영감의 기간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은혜를 구하려면, 그런 사랑을 받으려면 제 안의 것을 한 삽이라도 더 퍼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결핍은 사랑으로, 행복의 결핍은 행복으로 채워진다. 인간적인 사랑, 인간적인 행복을 버리면 말씀의 사랑, 말씀의 행복이 그만큼 채워질 것이라고 두렵게 기대하고 준비하면서 이만 물러갈까 한다.
삶의 고비마다 힘을 주신 특별성회
남선교회 이준희집사
1985년 교회에 처음 출석한 이후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그리고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잃게 되는 세상생활의 즐거움이 아쉬워 미등록 상태로 3년을 보내다가, 1987년 고난주간 특별성회 때 “십자가의 피”에 대한 설교 말씀에 대단한 충격을 받고 교회등록과 아울러 기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 1989년 취업이란 인생의 중요한 관문을 앞두고 절박함이 엄습할 때 고난주간 특별성회 기간 동안 작정기도와 말씀의 은혜로 신비스러운 기도 응답을 체험하게 됐던 일, 1991년 회사 생활의 권태기에 “겟세마네 승리케 하소서”란 말씀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신 일, 1997년 물질적인 욕심에 직장생활과 개인사업을 병행하다 IMF을 겪고 남들보다 몇 배의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철저히 회개한 일, 2002년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늘날까지 예상치 못한 고비고비 잠 못 드는 밤을 지샐 때마다 고난주간 특별성회는 나에게 다시 뛰게 하는 강력한 동력을 달아 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동안 받은 은혜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고,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기에 2009년 고난주간만큼은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동행하는 마음가짐을 미리 준비하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창세기의 족보>를 재조명하고 있다. 아담 타락 이후 말씀의 계보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구속사의 길을 걷다 보면 고통이 묻어 나오고,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그 동안 무관심했던 전도와 양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새신자를 대할 때마다 그 속에서 생명이 자라남을 느끼며 기뻐하게 되고, 전도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되며,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게 된다.
2009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기업들의 계속되는 도산 속에서, 일거리 감소와 자금난으로 너나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회사는 연초에 사업의 키워드를 ‘생존’이 아닌 ‘성장’으로 세웠다. 또한 성장을 위한 토대가 하나 하나 준비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나만이 갖는 소중한 경험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고난주간 특별성회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도 금년도를 살아갈 성장 동력이 선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